아직 밤의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이었다. 베란다 창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빠르게 밀려들었다.
몸보다 생각이 먼저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쓴 커피 한잔과 함께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이번주 마지막으로 유시민의 <공감필법>을 펼쳤다. 새벽이라는 시간과 이 책은 유난히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말수가 줄어드는 시간에 말과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묘한 균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다 한 문장에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견딜 만큼 견뎌보고 정말 혼자서는 못 견뎌낼 때 위로를 구하라는 말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리고 오늘의 단어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었다. 위로라는 단어였다.
“자주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함부로 남을 위로하려고 하지도 마시고요. 삶은 원래 고독한 것이고, 외로움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견딜 만큼 견뎌보고, 도저히 혼자서 못 견뎌낼 때 위로를 구하는 게 좋은데, 요즘은 다들 위로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그런 게 좀 못마땅합니다.”
공감필법 중에서 - 105page
위로.
1.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
2. 힘든 일을 한 사람에게 그 노력을 알아주고 격려하는 행위.
사전에서 말하는 위로는 상처받은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행위다. 힘든 일을 한 사람의 노력을 알아주고 격려하는 행위다.
정의만 놓고 보면 위로는 언제나 선하고 따뜻한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 속 문장은 그 정의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했다.
위로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오히려 삶의 힘을 약화시키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들렸다.
나는 위로를 오랫동안 좋은 말이라고만 생각해왔다. 누군가 힘들어 보이면 먼저 말을 건네고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틀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위로는 관계를 증명하는 언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의 위로를 떠올려보면 그 말은 쉽게 소비되고 빠르게 사라진다. 진심이 담기기도 전에 문장만 먼저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괜찮다는 말이 너무 쉽게 오가고 힘내라는 말이 자동응답처럼 반복된다.
위로라는 단어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견딤이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견디는 시간을 통과하지 않은 위로는 공허해지기 쉽다.
고통의 밀도를 충분히 겪지 않은 상태에서 건네는 위로는 말하는 사람을 편하게 만들 뿐 듣는 사람의 삶에는 닿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그 사실을 내 삶을 돌아보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혼자 견뎌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일부러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설명해야 하는 말이 버거웠고
위로를 듣는 일조차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위로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견딤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시간은 외로웠지만 헛된 시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고독 속에서 내 마음의 형태를 또렷하게 보게 되었다.
외로움은 피해야 할 감정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책 속 문장처럼 외로움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감정이라는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된다.
외로움은 나를 나에게로 데려오는 감정이었다. 누구의 말도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내 생각과 감정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기준을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었다.
위로를 생각하면 늘 관계를 떠올렸지만 이제는 먼저 나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
나를 충분히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 위로는 말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너무 몰아붙이지 않고, 하루를 실패로 단정하지 않으며 견딜 수 있는 만큼만 견디겠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태도다.
그렇다고 위로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견딜 만큼 견뎌본 뒤 정말 혼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건네는 위로는 삶을 다시 붙잡게 하는 힘이 된다.
그때의 위로는 설명이 길 필요도 없고 말이 많을 필요도 없다. 곁에 있어주는 침묵 하나면 충분할 때도 있다. 그 침묵은 말보다 더 정확하게 마음에 닿는다.
나는 요즘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상황에서 조금 더 조심해진다. 먼저 묻기보다는 기다리게 되었다.
지금 위로가 필요한지 아니면 혼자 견딜 시간이 더 필요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위로는 주는 사람의 성의보다
받는 사람의 상태가 먼저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빨리 괜찮아지기를 요구받는다. 슬퍼할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 그 틈을 위로라는 말이 채운다.
그러나 그 위로는 종종 슬픔을 건너뛰게 만들고 고통을 미완의 상태로 남긴다. 견디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나에게 위로는 이제 삶을 대신 살아주는 말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살아보게 하는 기다림에 가깝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한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말이다. 그 과정을 통과한 위로는 이전과 다른 무게를 지닌다.
가볍지 않아서 오래 남고
오래 남아서 깊이 새겨진다.
오늘 새벽 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오래 붙잡고 있었다. 따뜻한 말로만 알던 단어가 단단한 의미를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위로는 외로움을 지워주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통과한 사람에게 건네는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충분히 걸어왔다는 확인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위로는 빠르게 건네질수록 얕아지고 늦게 도착할수록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