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작년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하기 전, 제목만으로도 이미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을 주는 책인 <10억짜리 독서법>을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나는 독서를 통해 무엇이 바뀌는지보다 독서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지금의 독서량으로 그때 이 책을 만났다면 아마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용이 틀려서도 아니고 저자의 경험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문제는 책이 아니라 나였다. 당시의 나는 독서를 통해 다른 존재가 되고 싶기 보다는 독서를 통해 다른 결과를 얻고 싶어 했다.
1년이 지났다. 그리고 다시 이 책을 펼쳤다. 같은 문장인데 전혀 다르게 읽혔다. 같은 페이지인데 전혀 다른 사람이 읽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펼친 책장의 첫 페이지에서 만난 문장이 있었다.
“1년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과거의 세계가 부서지고 새로운 세상이 내 정신을 채웠다.
무(無)와 1이 완전히 다른 개념인 것처럼, 독서를 전혀 하지 않던 이전의 나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걸 느낀다.
독서는 나를 바꿨다.
또한 독서는 우리를 바꿀 수 있다. 원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책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10억짜리 독서법중에서 - 14page
존재.
1. 사람이나, 사물 현상이 현실 세계에 실재하는 것.
2. 보이거나 느껴지거나 의식 속에서 확인되는 ‘있음’의 상태.
저자가 말하는 바뀌었다가, 달라졌다가, 존재가 되었다는 표현은 이 새벽 나의 시선을 강하게 그리고 뜨겁게 끌어당겼다.
이 표현은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과를 증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상태를 말할 뿐이다. 그러나 그 상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이전의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다는 고백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살아 있음은 멈추지 않는다. 숨은 자동으로 쉬어지고 시간은 저절로 흘러간다.
그러나 살아가고 있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것은 의식해야 가능한 상태이며,
선택하지 않으면 쉽게 사라지는 감각이다.
나는 53년이란 시간을 살아 있었다. 그러나 나의 하루는 대부분 생존에 가까웠다.
유지해야 할 역할과 감당해야 할 책임과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들고 있던 기준들 속에 나는 나 자신을 확인할 여유를 거의 허락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변화보다 안정을, 의문보다 익숙함을 선택했고 나 자신을 묻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잘 기능하는 쪽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 사회는 그런 선택을 유도하는 데 매우 능숙하다.
변화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기를 요구하고 개성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비슷해지기를 강요한다.
조금만 흐름에서 벗어나면 불안해지고 조금만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은 감각을 심어 준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를
확인하는 일보다 버티는 일을 더 잘하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는 점점 얇아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사치가 되고 지금 잘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불편해진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으니까.
그러나 살아 있음에 만족하는 순간, 우리는 살아가고 있음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존재는 유지되지만 존재의 밀도는 점점 낮아진다.
독서는 나에게 이 차이를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책은 당장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내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어떤 날은 그냥 지나가고 어떤 날은 오래 남는다. 그 차이는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읽는 나의 상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독서를 통해 존재가 바뀐다는 말은 삶의 조건이 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의미에 가깝다.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종종 오해로 변질된다.
더 빨리 가는 것, 더 크게 이루는 것, 더 눈에 띄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변화는 그 방향이 아니다. 그것은 서두르지 않는 변화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지 않는 변화다.
지금의 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조금 더 나다운 쪽으로 이동하는 변화다.
나는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몸은 속일 수 없고 회복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속도보다 방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
아니면 살아가고 있는가.
살아가는 존재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흔들림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조금씩 방향을 조정하는 사람이다.
존재란 결국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계속 확인해야 하는 감각이다.
그래서 나는 존재를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존재란 그냥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변화를 통해 나 자신을 계속 갱신해 나가는 상태라고.
나는 ‘존재’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존재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살아 가고 있음을 묻는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