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10억짜리 독서법>은 독서 기술을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독서를 대하는 태도를 다시 묻게 하는 책에 가까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더 잘 읽는 방법보다 독서를 통해 무엇을 확인해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독서는 늘 성장의 도구였지만 동시에 나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아직 완전히 밝아오지 않은 새벽이다. 창밖의 공기는 차갑고 집 안은 고요하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는다.
회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몸과 달리 마음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인다. 새벽이라는 시간은 늘 그렇듯 생각을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오늘 내가 붙잡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런 저의 내향적인 모습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스스로를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건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무의식적인 강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다가가는 외향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이 가져다준 7가지 삶의 변화중에서 - 13page
강박.
1. 외부의 힘이나 압력에 의해 원하지 않음에도 어떤 행동이나 상태를 강요당하는 것.
2.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생각이나 행동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거나 행해지는 상태.
이 정의를 천천히 읽으며 나는 그동안 강박을 얼마나 극단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해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강박을 특정한 행동을 멈추지 못하는 상태나 지나친 집착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나의 강박은 매우 조용했고 일상적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활발해야 한다는 믿음, 분위기를 이끌 줄 알아야 한다는 기준, 내향적인 태도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암묵적인 판단들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믿고 싶어 했다.
외향적인 사람이 더 유리해 보였고 더 건강해 보였으며 더 사회에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성격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생존 전략에 가까웠다. 그렇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나는 이 강박이 전적으로 개인의 성향이나 선택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기준을 은근하게 주입해왔다.
말 잘하는 아이, 적극적인 학생, 눈에 띄는 사람, 조용한 태도보다는 활발함이, 신중함보다는 빠른 반응이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자랐다.
이 기준은 명령처럼 들리지 않기에 더 깊숙이 스며든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의심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쌓인 기준들은 생각이 아니라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곧 정체성처럼 자리 잡았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배워버린 셈이다.
그 결과 강박은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미 몸에 밴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세뇌된 것처럼 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도 그것이 부담인지, 압박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잘하고 있다고 믿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안에서 조금씩 나 자신을 밀어내게 된다.
결국 이 강박은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게 만든다. 타인의 기대에 맞춘 모습, 사회가 선호하는 태도, 평균적인 기준에 가까운 얼굴로 하루를 채운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어긋난 것이 없지만, 속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가 쌓인다.
그 피로의 정체가 바로 나를 벗어나 살고 있다는 신호였다는 사실을, 나는 꽤 늦게서야 알아차렸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외향적이어서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그 방향으로 밀어 넣어왔다는 점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향적인 나의 감각을 무시했고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낭비처럼 여겼다.
강박은 그렇게 나의 선택인 척하며 자리를 잡았다.
강박의 감정은 언제나 성실함이나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더 해야 한다. 더 나아져야 한다. 멈추면 뒤처진다.
이런 문장들은 쉽게 미덕처럼 들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재촉하는 채찍이 된다. 나는 그 채찍을 스스로 들고 나 자신을 몰아붙여 왔다.
누구의 요구인지조차 잊은 채로 말이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나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내 몸과 마음을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처럼 밀어붙이면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려주었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으면 회복은 오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그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강박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위험 신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강박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묻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정해놓고 그 틀에 나를 끼워 맞췄다.
그 결과 나는 많은 일을 해냈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야 할 감각들을 놓치고 있었다. 만족보다 안도가 먼저 오는 삶이었다.
이제 나는 강박을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알아차려야 할 신호로 받아들이려 한다.
무엇을 하고 있을 때 유난히 불안해지는지, 멈추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강박은 힘을 잃기 시작한다.
나를 움직이던 압력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실천의 단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다만 모든 선택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덧붙이려 한다.
이 행동은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야만 한다고 믿어서 하는 것인가?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삶의 속도는 조금 느려지고 방향은 조금 선명해진다. 강박은 질문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위로의 단계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조용해도 괜찮다. 앞에 나서지 않아도 충분하다.
생각이 많은 사람은 행동이 느릴 수 있지만 그 느림 안에는 깊이가 있다. 나는 그 깊이를 버리고 속도만 택해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강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기준을 내려놓는 일이다.
남의 속도가 아닌 나의 호흡을 기준으로 살아보겠다는 선택이다. 그 선택은 여전히 두렵지만 이전처럼 나를 소모시키지는 않는다.
나는 ‘강박’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강박은 사회가 요구한 기준을 내 성격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가장 조용한 세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