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아직 새벽의 공기가 집 안에 고요하게 머물러 있을 시간이었다. 밤과 아침의 경계가 흐릿한 이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작년 가을에 읽었던 <거인의 노트>를 다시 펼쳤다. 생각의 거인이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몸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사고의 크기를 조금씩 넓혀 가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이 새벽을 다시 불러왔다.


형광펜으로 여러 번 겹쳐 그어 두었던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수도 없이 되뇌었던 단어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또렷하게 다가왔다.

“계획이란 시간표를 빈틈없이 채우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려 메모하고

큰 틀에서 시간을 배분하는 것,


그것이 계획의 핵심이다.”


거인의 노트 중에서 - 36page



계획.

1.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의 내용, 절차, 방향을 사전에 세워 두는 것.

2. 시간, 방법, 수단 등을 고려해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과정.


저자가 계획이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까지 명확한 정의를 내려놓은 것을 보며 계획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그 질문보다 더 깊게 파고든 것은 다른 감정이었다. 이 문장을 읽는 동안 마음 한가운데가 찌르는 듯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의 이유를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저자가 말한 계획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계획을 두고 살아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큰 틀을 바라보는 대신 세부를 붙잡았고 하고 싶은 마음을 살피기보다 반드시 지켜야 할 항목을 먼저 적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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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방향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굳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계획을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로 이해하며 살아왔다.


한 번 세운 계획은 수정해서는 안 되는 약속처럼 여겼고 그 계획을 지키지 못한 날은 스스로를 느슨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빈틈없는 계획이야 말로 삶을 낭비 없이 사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루의 시간표가 꽉 차 있어야 안심이 되고 계획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는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 믿음은 성실함이라기보다 강박에 가까웠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을 조금은 후회한다.


계획을 세우느라 많은 시간을 썼지만 그 계획에 맞지 않는 하루를 살아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자주 깎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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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삶을 돕기 위한 도구였는데

어느새 삶을 재단하는 기준이 되어 있었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몸이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하루의 컨디션은 매번 달랐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 이어져야 했다.


계획을 완수하지 못한 날에도 하루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며 계획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계획은 완성도를 요구하는 약속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기준선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우리 사회는 계획을 지나치게 무겁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이지 않으면 준비가 안 된 사람처럼 보이고 치밀하지 않으면 성급한 선택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지쳐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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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실천은 늘 다음 단계로 미뤄진다.


계획은 점점 안전장치가 아니라 시험지가 된다. 이 정도면 해도 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남들에게 보여도 괜찮은 수준인가를 먼저 따진다.


그 과정에서 계획은 실천으로 가는 다리가 아니라 실천을 가로막는 관문처럼 기능한다.


나 역시 그런 구조 안에서 오래 머물렀다. 계획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렸고 조금이라도 어긋날 것 같으면 시작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하고 싶었던 일들은 마음속 메모로만 남아 있었다.


지금의 나는 계획을 다시 정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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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나를 통제하기 위한 규칙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확인하는

지도에 가깝다.


지켜내지 못했다고 나를 몰아붙이기보다 방향을 다시 잡기 위해 잠시 펼쳐 보는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하다.


계획이 가벼워질수록 실천은 가까워진다. 완벽한 설계가 없어도 오늘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무게를 가진다. 계획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고 계획을 지켜야 성취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에 굳이 토를 달고 싶지 않다. 또한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정의를 덧붙이고 싶지도 않다.


이미 충분히 많은 매체들이 계획의 중요성과 방법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에서 붙잡고 싶었던 것은 계획을 잘 세우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계획을 사진처럼 다루지 않으려 한다. 한 번 셔터를 누르면 그대로 완성되어야 하고 조금만 흔들려도 실패가 되는 방식 말이다.


그런 계획 앞에서는 늘 긴장했고 틀어질까 봐 시작조차 망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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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나는 계획을 풍경화처럼 바라보고 싶다.

처음에는 대강의 윤곽만 있고

가까이 다가가며 선을 고치고 색을 덧입히는 방식.


날씨와 빛에 따라 달라지고 그날의 마음에 따라 다시 손이 가는 그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계획은 더 이상 나를 멈추게 하는 기준이 아니었다. 움직이며 수정해도 괜찮은 여지였고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계획이 없어도 삶은 앞으로 나아간다.


성장은 완벽한 준비 끝에서 시작되는 일이 아니라

시작을 허락한 그 순간에 이미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완벽함이 아니라 시작이 바로 계획이라는 생각을 나는 오늘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계획’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계획이란 찍는 순간 완성되는 사진이 아니라, 그리며 수정해 가는 풍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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