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라는 강력한 동장군을 데려온 겨울의 냉기가 창밖에서 거실로 들어오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새벽이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그 위력이 피부를 아프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달라진 어둠과 아침 사이의 시간과 기온이지만 난 움츠러든 몸과는 달리 차 한잔을 들고 앉은 책상에서의 나는 여전히 조금 느리게 책을 꺼냈다.
기록을 통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 거인의 노트를 펼쳤다. 오늘도 무엇을 더 배우기보다는 이미 내 안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어떻게 이어볼지 생각하고 싶었다.
“우리가 접하는 책이나 영화 등의 콘텐츠에는 해석의 자유가 있다.
자유로운 해석들이 결함해서 새로운 것을 생성하는 게 콘텐츠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가치다.
우리의 배움은 타인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해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했을 때 더 깊어진다.” 거인의 노트중에서 - 133page
결합.
1. 사람, 사물, 요소 등이 함께 이어져 하나의 상태를 이루는 것.
2. 물리적, 화학적, 개념적, 요소들이 합쳐져 새로운 결과를 만드는 것.
나는 이 정의를 읽으며 결합이 단순한 합침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결합은 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쪽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나는 결합을 그동안 결과의 언어로만 이해해왔다. 무언가를 더해 더 큰 것을 만드는 일. 성과가 눈에 보이는 방식의 연결만을 결합이라 여겼다.
그래서 결합은 늘 능력의 문제처럼 느껴졌다. 내가 부족하면 만들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니 내 삶은 이미 수많은 결합 위에 놓여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어진 선택들.
우연처럼 보였지만 쌓여 있던 감정들.
그 결합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었다. 결합은 계획된 연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서 중요한 결합은 대부분 뒤늦게 이해된다.
그때는 별 의미 없던 사건이 시간이 지나 다른 경험과 만나며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결합은 항상 나중에 말을 걸어왔다.
결합이 그렇게 늦게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는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한 덩어리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감정과 선택을 분리해 생각했다. 감정은 감정대로 흘려보내고 선택은 이성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온 시간은 자주 어긋났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이 반복되었다. 지금의 나는 그 어긋남이 결합의 부재였다는 것을 안다.
느낀 것을 돌아보지 않았고 선택의 이유를 감정과 이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삶은 매번 새로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 쌓여갔지만 결국 서로 연결은 없었던 것이다.
결합은 기억을 다르게 만든다. 과거의 선택이 현재의 감정과 만날 때 그 기억은 더 이상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지금의 태도를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그렇게 결합된 기억은 나를 설득한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결합보다 분리를 쉽게 택한다. 일과 삶을 나누고 성공과 실패를 가르고 감정과 선택을 떼어낸다. 그 분리는 편리하지만 오래 버티기 어렵다.
결합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요소가 하나로 작동가히 위해서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시간 속에서 감정은 가라앉고 선택은 떠오른다. 결합은 속도가 아니라 숙성의 문제에 가깝다.
숙성의 기간동안 우리는 당장의 의미를 묻지 않고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를 바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 마음이다.
결국 결합은 조급함을 견디는 사람에게만 허락된다.
투병의 시간은 나에게 결합을 강요했다. 몸의 변화와 마음의 흔들림을 따로 둘 수 없었다. 하루의 컨디션과 감정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삶을 하나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픔은 아픔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의 삶을 돌아보게 했고 앞으로의 선택을 바꾸게 했다.
고통과 성찰이 결합되면서 나는 전과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결합이 나를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나는 더 이상 삶을 조각 내어 설명하지 않게 되었다. 결합은 완성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행의 언어에 가깝다. 계속 이어지고 계속 수정된다.
그래서 결합에는 항상 여지가 남아 있다.
그 여지가 삶을 숨 쉬게 한다.
나는 ‘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결합이란 서로 다른 요소들이 이해와 선택의 숙성 과정을 거쳐 하나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