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시간이었다. 창밖은 오늘도 차가웠고 집 안에는 밤의 기운이 냉기를 품은 채 남아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작은 생각을 꾸준히 적어 내려가다보면 어느새 나는 거인이 되어있을 것이란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나를 이끌어줄 단어를 찾아 헤맸다.
그렇게 시선이 멈춘 곳은 서로 상반된 의미를 품고 있는 문장이었다.
“관계가 확장이 전제되지 않으면
삶 또한 확장되지 않는다.
관계 확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관계를 끊어 내는 데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확장이 전제됐을 때 불필요한 관계도 깔끔하게 정리해 낼 수 있다.” 거인의 노트 중에서 - 207page
확장.
1. 공간, 영역, 세력, 기능 등을 기존보다 더 크게 넓히는 것.
2. 개념, 생각, 해석 등을 원래보다 더 많은 범위로 발전시키는 것.
확장은 보통 넓히는 일로 이해된다. 공간을 넓히고 영역을 넓히고 관계를 넓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확장을 성장의 증거처럼 받아들인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상태를 자연스럽게 확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문장은 확장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관계가 확장되지 않으면 삶도 확장되지 않는다는 말은 익숙하다. 하지만 확장이 전제될 때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는 말은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나는 그 문장에서 확장이 단순히 더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확장은 선택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지
무작정 늘리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장을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더 받아들이려면 먼저 비워낼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늘 채우는 데에는 익숙했지만 공간을 만드는 데에는 서툴렀다. 확장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축적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셈이다.
확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나는 물질의 확장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의 확장이다.
이 두 가지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작동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때 삶은 쉽게 과밀해진다.
물질의 확장은 눈에 잘 보인다. 더 넓은 집, 더 많은 물건, 더 촘촘한 일정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물질의 확장은 즉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장의 불안을 잠시 가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확장을 반복한다.
그러나 물질의 확장은 공간을 넓히는 동시에 공간을 잠식한다. 물건이 늘수록 관리할 것이 늘고 선택의 부담도 커진다.
관계가 늘수록 마음을 써야 할 방향은 분산되고, 확장을 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움직일 여백이 줄어드는 경우도 많다.
나는 한동안 바쁜 상태를 성장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일정이 빽빽할수록 내가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연락처가 늘어날수록 관계가 확장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삶은 넓어지지 않고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확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쉴 틈이 없었고 생각이 머무를 자리가 없었다.
무언가를 끊어내지 못한 채 계속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질의 확장은 있었지만 내면의 확장은 멈춰 있었던 것이다.
반면 내면의 확장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숫자로 증명되지도 않고 타인이 쉽게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러나 내면의 확장은 삶의 밀도를 바꾼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달라진다.
내면의 확장은 생각의 여백에서 시작된다. 모든 관계에 즉각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다. 모든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확신이다.
그 여유가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확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관계를 정리하는 일에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잃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이 확장되면 관계를 끊어내는 일이 파괴가 아니라 조정이 된다. 모든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감각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관계를 정리하는 일을 냉정함으로 오해해 왔다. 그래서 불편한 관계를 끌어안고 지내는 것을 성숙이라 여겼다.
그러나 내면이 확장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관계 유지란 종종 자기 소모에 가깝다. 확장이 없는 상태에서는 끊어냄도 두려움이 된다.
내면의 확장은 기준을 만든다. 무엇을 더할지보다 무엇을 덜어낼지를 판단하게 한다. 이 기준이 생길 때 관계는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 된다.
그리고 확장은 넓어지는 것을 넘어 선명해지는 일이 된다. 확장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비워내는 일이다.
시간을 비우고,
관계를 비우고,
기대를 비우는 일이다.
그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준비에 가깝다.
비워진 자리에만 새로운 것이 들어오고 그 것이 확장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투병의 시간은 나에게 강제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몸이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자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삶의 밀도를 느꼈다. 무엇이 없어져도 괜찮은지 무엇이 반드시 필요한지를 구분하게 되었다.
그 경험 이후 확장은 나에게 다른 의미가 되었다. 더 많은 것을 갖는 일이 아니라 더 적은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다.
그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관계는 단순해지고 선택은 명확해졌다. 확장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확장을 이렇게 이해한다.
확장은 삶을 넓히기 위해 무언가를
더하는 일이 아니다.
삶이 숨 쉴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 공간이 생길 때 관계도 삶도 자연스럽게 재정렬된다.
나는 ‘확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확장이란 끝없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비워내며 깊어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