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여전히 진행중인 한파로 인해 새벽의 온도는 차갑고 공기는 여전히 무겁다. 창밖은 조용하고 세상은 아직 깨어날 준비를 하지 않은 얼굴이다.


늘 그렇듯 책상 앞에 앉아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을 펼친다. 글을 쓰는 실제적 방법을 위해 꼭 해야 할 독서에 대한 기본을 알려주는 한권의 책 속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문장 하나에 머물기 위해서다.


오늘 내가 이 책에서 찾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책읽기는 마치 양수로 가득 찬 자궁과 같습니다.


자궁은, 세상의 잔인함에 결코 새 생명을 노출시키지 않는 모성의 상징이 아니던가요. 홉스봄도 러셀도 그 자궁에서 자랐습니다.


비록 들어올 때는 상처투성이였으나,


나갈 때는 마침내 치유되는 곳. 힘들고 지칠 때면,

책이라는 자궁으로 회귀해보시길!”

책읽기 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중에서-33page


치유.

1. 의학적, 신체적 차원에서 질병이나 상처가 회복되는 것.

2. 정서적, 심리적 차원에서 아픔이 완화되고 평온을 되찾는 과정.


치유의 사전적 정의는 명확하지만 이 단어를 실제 삶에 가져다 놓는 순간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나는 작년에 사전적 의미로의 치유를 모두 경험했다. 몸은 치료의 과정을 거쳤고 마음 역시 회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는 치료가 끝났다는 말을 들었고 정서적으로도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 아직 완전히 어떤 결과에 도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몸은 여전히 경과를 지켜봐야 하고 마음은 아직도 치유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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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는 말과 괜찮아졌다는 감정 사이에는

생각보다 긴 간극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치유라는 단어를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치료가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치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는 봉합되었지만 기억은 남아 있고 통증은 사라졌지만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치유는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조용히 시간을 통과하며 조금씩 진행된다.


이 책에서 말한 책이라는 자궁의 비유가 오래 남는다. 자궁은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억지로 밀어붙이는 공간이 아니다.


보호하는 공간이고 기다리는 장소다. 상처투성이로 들어온 존재가 당장 달라지지 않아도 괜찮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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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있어도 허락되는 공간이다.


독서를 하며 나는 종종 그 자궁 안으로 돌아간다.


세상에서는 괜찮은 척해야 하고 이미 회복된 사람처럼 살아가야 하지만 책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직 아픈 상태 그대로 있어도 되고 다 낫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책은 나에게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충분히 머물러도 된다고 말해준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치유는 다양한 방식일 필요하다. 감정의 차원에서 치유는 특히 그렇다. 마음은 치료처럼 정확한 일정표를 따르지 않는다.


어느 날은 괜찮다가도 이유 없이 무너진다. 나는 예전의 나로 완전히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서 조금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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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원래의 상태로 복구되는 일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천의 차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다만 서두르지 않는 것이다. 이미 나았다는 말로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 시간이 그래서 중요해진다. 이곳에서는 아직 치유 중인 나로 존재해도 괜찮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머물 수 있다.


위로의 관점에서 치유는 나에게 이런 말로 다가온다. 아직 괜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지금 이 속도여도 충분하다는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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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자궁 안에서 나는 그 말을 반복해서 듣는다.

그리고 그 반복이 나를 조금씩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조금은 단단해진 상태로.


나는 ‘치유’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치유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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