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한파가 이어진 탓에 창밖의 공기는 단단했고 서재의 온도는 아직 밤의 쪽에 머물러 있었다. 짧은 명상을 하듯 숨을 고른 뒤 책상 앞에 앉자 생각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


이 시간에 책을 펼치면 감정이 먼저 가라앉는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감각들이 안쪽으로 접히고 나는 비로소 책의 호흡에 맞춰진다.


오늘도 <도둑맞은 집중력>을 손에 들고 집중을 잃은 시대에 대해 말하는 이 책에서 나는 뜻밖에도 공간이라는 단어 앞에 오래 머물게 되었다.

“사람들은 핵심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책의 여러 다른 부분을 하나로 합칩니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독서에서의 결함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독서다.


지금 정신이 배회하게 두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방황할 정신적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도둑맞은 집중력 중에서 - 147page



공간.

1. 물체나 사람이 차지하고 있거나 존재할 수 있는 자리나 범위

2. 사물과 사물 사이의 비어 있는 부분.

3. 시간, 개념과 대비되는 물리적, 추상적 영역.


이 문장을 읽으며 집중을 방해한다고 여겨왔던 방황이 오히려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라는 말은 내 독서 경험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사전 속의 정의를 따라가다 보면 공간은 언제나 ‘있음’보다 ‘비어 있음’에 가깝게 설명된다. 차지하고 있지 않은 자리. 아직 채워지지 않은 범위.


이 정의를 곱씹으며 나는 문득 내 안에 남아 있는 공간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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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 안에는 공간이 남아 있을까라는

질문이 조용히 떠오른다.


몸을 떠올려 보면 생물학적으로 공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몸에 공간이 생긴다는 것은 곧 생명을 위협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뇌일까라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그러나 뇌 역시 공간이 생기는 순간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면에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적 공간. 여백. 숨 쉴 틈 같은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여기서 나는 잠시 어지러워진다. 위치는 알려주지 않으면서 공간을 만들라고 말하는 이 조언들은 도대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 혼란 속에서 공간을 감정의 차원으로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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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공간이 없다고 느낄 때의 감정은 대개 답답함이다. 생각이 겹치고 감정이 겹치며 선택지가 사라진 듯한 느낌.


반대로 공간이 생겼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여유가 찾아온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한 발 물러선 듯 느껴진다.


이 차이는 공간의 물리적 유무가 아니라 인식의 거리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건과 나 사이에 얼마나 틈이 생겼는가의 문제다.


책에서 말하는 정신적 공간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방황은 집중의 실패가 아니라 이해를 위한 거리 두기다.


한 문장을 읽고 바로 결론으로 가지 않는 시간, 앞서 읽은 장면과 뒤에 올 내용을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오가게 두는 상태.


그 방황의 시간 속에서 생각은 서로 부딪히고 겹쳐지며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공간이 없었다면 이 연결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실천의 차원에서 공간을 생각해 본다.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더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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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덜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생각을 즉시 판단하지 않고

모든 감정을 바로 정리하지 않는 태도.


독서 중에 떠오른 다른 생각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잠시 옆에 두는 짧은 미룸이 오히려 정신적 공간을 만든다.


투병의 시간을 떠올려 보면 그때의 나는 의도치 않게 많은 공간을 경험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면서 생각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결정을 미뤄야 했고 기다려야 했으며 당장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 시간은 불편했지만 동시에 내면에 여백을 만들었다.


무언가를 채우지 않아도 하루가 지나갔고 그 하루는 비어 있지 않았다.


공간은 공허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밀도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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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공간은 나를 쉬게 한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이 생기면

마음은 스스로 숨을 고른다.


공간이 있다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을 허락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 새벽의 서재에서 나는 책장을 덮으며 공간이라는 단어를 다시 내려놓는다.


나는 ‘공간’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공간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가 아니라 나와 생각 사이에 생기는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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