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하루 종일 소리 없이 쏟아진 눈이 베란다 밖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 두었고, 아직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고요한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늘 같은 자리에 서있지만 밖의 풍경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마치 처음 맞이하는 하루인 것처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차 한 잔을 올려놓고 천천히 숨을 고른다.
오늘도 상담하는 자세로 <혹시모른 내마음>을 펼쳤고 조금은 아픈 문장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 처음 사랑받고 사랑했던 숙명으로 이어진 어머니, 운명의 사랑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도저히 그들을 탓할 수 없으니 자신이 문제라고 결론짓는 것이 최선인 것으로 보였다.”
혹시 모른 내마음 중에서 - 156page
최선.
1. 가장 좋고 알맞은 상태.
2. 힘이나 능력을 다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내려고 함.
이 문장은 이상할 만큼 가슴을 눌렀다. 탓할 수 없으니 자신을 탓하는 선택. 그 선택을 최선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그 단어에 오래 붙들렸다.
우리는 최선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무겁게 받아들인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문장은 어딘가 결연하다.
마치 물러설 곳이 없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힘과 능력을 다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내려고 함이라는 사전의 정의는 정직하지만 그 안에는 숨이 차는 기색이 있다.
나는 요즘 최선이라는 단어가 과하게 부풀려진 사회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심지어 사랑에서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게으른 사람이 되고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분위기.
최선은 어느새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 문장 속의 인물은 어머니도 아내도 탓하지 못한다. 사랑했던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향해 분노를 돌릴 수 없다. 그래서 화살은 자신에게 향한다. 자신이 문제라고 결론짓는 것이 최선처럼 보인다.
나는 그 선택이 왜 가슴 아픈지 곱씹어 본다. 최선이라는 말이 자책과 맞닿아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쉽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는가.
최선은 원래 가장 좋고 알맞은 상태다. 가장 좋다는 말은 비교의 끝에 있다는 뜻이고 알맞다는 말은 균형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균형을 놓치기 쉽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전부를 소진하는 일로 오해될 때, 그 단어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아니라 삶을 짓누르는 무게가 된다.
나는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최선의 의미를 다시 배웠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을 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일이 아니었다.
그날의 컨디션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움직이는 것.
쉬어야 할 때는 쉬는 것.
무리하지 않는 선택도 때로는 최선이었다.
예전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했다면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에 맞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알맞은 상태였다.
요즘 우리는 경쟁이라는 언어에 길들여져 있다.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보다 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최선은 끝없는 확장의 단어가 된다.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높이.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와 몸의 신호를 무시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
나는 문득 묻는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정말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인가.
소중한 생명까지를 포함하는 일인가.
그렇게까지 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탓할 수 없어서 자신을 탓하는 선택이 최선이 되어야 하는가.
최선은 희생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균형의 이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 상황과 능력과 감정을 모두 고려한 결정. 그것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아는 태도에 가깝다.
그 문장을 다시 읽으며 나는 느낀다. 자신을 문제로 결론짓는 것은 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타인을 향한 분노보다 자신을 향한 자책이 더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과연 가장 알맞은 상태였을까. 혹시 그 또한 관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과하게 소모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새벽의 공기가 조금씩 밝아온다.
빛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퍼진다.
빛은 최선을 다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궤도를 따른다. 그 자연스러움이 가장 좋은 상태다.
우리에게도 그런 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전력을 다해 소진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의 리듬을 지키는 방식.
남들이 보기에 충분하지 않아 보여도 상관없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최선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최선’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최선은 전부를 잃는 선택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선택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