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8.오늘, 나는 시간을 현금화 했다.

by 마부자

점심을 먹고는 아내와 볼링장으로 향했다. 평일에는 아내를 데려다주고 나는 돌아오지만, 주말은 다르다. 주말은 동반자 모드다.


볼링공을 굴리며 스트라이크보다 중요한 건 “그래도 잘했네”라는 한마디라는 걸 이제는 안다.


볼링을 마치고 우리는 집이 아닌 중심가로 향했다. 지난 6개월간 치과를 다니며 35년을 내 입속에서 번쩍이던 금이빨 다섯 개를 모두 교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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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한 시대를 마감했다.


그 금이빨을 들고 보석상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기왕 파는 김에 집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14k, 18k 금도 몽땅 챙겼다. 결혼 전부터 모았다기보다는, ‘혹시 몰라’ 버리지 못했던 것들이다.


핸드폰 고리, 젊은 시절 내 귀를 장식하던 귀걸이, 술 마시고 흥에 겨워 길거리 니어커에서 샀던 14k 반지와 목걸이. 그때는 14k는 금으로도 안 쳐준다는 말에 서운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이렇게 효자가 될 줄이야.

사실 속으로는 아쉬움도 있었다.


황금송아지나 골드바를 모아둘 걸 그랬나 하는. 그런데 내 인생은 늘 그런 식이다. 골드바는 없지만 핸드폰 고리는 있다. 거창하진 않지만, 현실적이다.


첫 번째 보석상에 들어가 금이빨부터 내밀었다. 주인장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제시한 금액에 나와 아내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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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속에 그렇게 큰 자산이 있었단 말인가.

우리가 몰랐던 입속의 경제.


그리고 상자 속 액세서리들을 꺼냈다. 대부분 14k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장이 무게를 재고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말했다.

“이거 꽤 나가겠는데요?”


그리고 보여준 숫자를 보고 우리는 동시에 “이게 맞아요?”를 세 번쯤 반복했다.


주인장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14k를 이렇게 많이, 한꺼번에 들고 오신 분은 처음이에요.”


가장 놀라웠던 건, ‘이건 받아줄까?’ 싶어 넣어둔 20년 전 핸드폰 하트 장식이었다.


그 작은 녀석이 무려 18k였다.

그것이 오늘의 MVP였다.

인생은 역시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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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았다기보다는,

버리기 애매해서 던져둔 것이었는데.


보석상에서 금을 팔고 나오니 묘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영화에서 보듯 검은 가방을 건네받고 묵직한 현금다발을 확인하는 장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치 내가 비밀 자산을 정리하고 나온 사람처럼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보기도 했다.


누가 보면 소액 투자 수익 실현한 중년 남성일 뿐인데, 내 기분은 거의 범죄영화 마지막 장면이었다.


생각해보면 오늘은 참 묘한 하루였다. 오전에는 미래를 위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오후에는 과거를 팔아 현금으로 바꿨다.


한 손에는 2026년 계획서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1990년대의 하트 장식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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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을 하루 만에 왕복한 셈이다.

미래를 설계하고, 과거를 현금화하는 작업이라니.

이 정도면 나도 제법 전략적인 인간 아닌가 싶었다.


입속에서 35년간 번쩍이던 금이 사라졌다. 그 금이빨은 나의 청춘과 함께 씹고, 웃고, 말하던 동반자였다. 솔직히 조금은 섭섭했다.


그런데 그 녀석들이 이렇게 현금으로 변신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마치 오래된 친구가 “그동안 고마웠다”며 봉투를 건네주는 느낌이었다.


서랍 속에서 잠자던 장신구들도 떠났다. 한때는 나를 멋있다고 착각하게 해주던 귀걸이, 술김에 샀던 반지, 핸드폰에 달고 다니던 하트 장식.


그 시절엔 반짝임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무게가 전부였다. 특히 그 작은 하트가 18k였다는 사실은 오늘의 반전 드라마였다.


나는 그동안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교훈을 금속에게서 배웠다.


나는 오늘 깨달았다. 인생은 황금송아지를 사 모으는 게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별것 아닌 것들을 “혹시 몰라” 하고 챙겨두는 태도였다.


니어커에서 산 반지도, 유행 지난 목걸이도, 언젠가는 제값을 하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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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것이 금값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생각보다 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많이 쌓아둔 사람이었다. 35년을 함께한 치금, 20년을 버텨온 하트, 결혼 전의 기억들.


그것들이 오늘 한 번에 정산되었다. 과거를 처분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가벼워졌다.


골드바는 없지만, 나름의 스토리가 있다. 황금송아지는 없지만, 황금 하트는 있었다. 그리고 그 하트가 오늘 내 하루를 가장 값지게 만들었다.


가방은 가벼워졌고, 계좌는 조금 묵직해졌고, 마음은 꽤나 상쾌했다.


이 정도면 내 인생, 제법 괜찮은 투자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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