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많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비였다. 우산을 쓰기엔 번거롭고, 그냥 맞기엔 애매한 정도.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며칠 전 함박눈이 남겨놓은 마지막 흔적까지 말끔히 쓸어가기에는.
골목 구석,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자리에 남아 있던 눈의 잔재가 비에 녹아 사라졌다. 괜히 아쉬웠다. 어차피 녹을 눈이었는데도, 조금 더 남아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눈이 사라지는 속도가 꼭 어떤 추억이 옅어지는 속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좀처럼 낫지 않는 감기 때문에 병원에 다녀왔다. 큰 병은 아니지만, 애매하게 오래 가는 증상이 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열이 펄펄 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쩡하지도 않은 상태. 몸이 “좀 쉬어라” 하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젊을 때는 아프면 억울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할 일은 많고, 나가야 할 곳도 많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다. 아프면 일단 멈춘다. 그냥 겁이 난다.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기대 앉았다. 책을 펼쳐 들었지만 한동안 글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빗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일정한 리듬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래전 좋아했던 노래가 떠올랐다. ‘비와 당신’. 영화 속에서 배우 박중훈이 불렀던 그 노래. 처음 들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을 붙잡았던 곡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냥 완전히 빠져버렸다.
한동안은 내 애창곡이었다. 노래방에 가면 꼭 불렀고, 제법 잘 부른다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실력보다는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이면 괜히 목이 잠겨도 더 분위기 있어 보인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열창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은 마이크도 없고 청중도 없었지만, 빗소리를 배경 삼아 혼자 흥얼거렸다. 감기 기운 때문에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고, 덕분에 괜히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몸은 좀처럼 낫지 않아도, 노래 한 소절은 마음을 잠시 가볍게 해주었다.
비는 하루 종일 꾸준히 내렸다. 창밖은 흐렸지만, 실내는 이상하게도 고요했다. 나는 소파에 기대 앉아 책을 읽다가 잠깐 졸고, 다시 읽고, 또 멍하니 비를 바라보았다. 생산성은 거의 없었지만, 나름 충만한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눈도, 비도, 감기도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다만 그 순간에는 꽤 진지하게 느껴질 뿐이다. 며칠 전 눈이 그렇게 요란하게 내렸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 감기도 언젠가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비가 골목의 눈을 지워버린 것처럼, 오늘의 비는 내 몸에 쌓여 있던 피로도 조금은 씻어갔기를 바란다.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하루를 조용히 보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아직 고음이 올라가는 나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대학생이 된 막내의 한달 용돈을 합의 봤습니다. 서로 웃으며 타협되어 감사했습니다.
이웃들의 블로그를 보다 몰랐던 귀한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런 정보를 제공해준 블벗님들께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