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손해’의 기준을 다시 정하면, 손해라고 믿어온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by 마부자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고, 베란다 건너 건물들 사이로 엷은 붉은 기운이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는 시간 어둠과 밝음이 서로 물러나지 않으려는 듯 잠시 겹쳐 있는 시간이다.


나는 차 한 잔을 내려 식탁에 앉는다. 따뜻한 김이 천천히 올라오고, 그 너머로 <수요일의 편지>를 다시 펼친다.


페이지를 넘기다 가볍게 던지는 두사람의 대화가 내게는 다소 이 어둠처럼 무겁게 나를 누르며 오래 남았다.

“그러니까 말이야, 요컨대 기껏 세상에 태어났는데 놀지 않으면 손해라고 생각해. 하고 싶지 않은 일만 하는 사이에 인생이 끝나다니, 너무 싫지 않냐?


고누마의 말이 너무나 정론으로 들려서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지루한 반론이 숨바꼭질했다.”


수요일의 편지 중에서 - 86page



그 대화속에 있는 ‘손해’라는 단어가 내 안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손해의 사전적 정의는 이익이 줄거나 잃게 되는 것, 또는 본래 있어야 할 이익이나 권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 문장을 한 번 더 천천히 읽어보았다. 특히 ‘본래 있어야 할 이익’이라는 표현에서 잠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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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본래 나의 것이었는가.

무엇이 당연히 내 손에 쥐어졌어야 했는가.


우리가 손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이미 전제가 하나 깔려 있다. 그것은 그 무언가가 원래 내 몫이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면, 정말로 처음부터 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건강을 잃으면 손해라고 말하고, 계획이 어그러지면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마치 권리를 침해당한 듯 속이 상한다.


그러나 그 건강과 시간과 결과가 정말로 보장된 것이었는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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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손해라는 감각은 실제로 잃은 양보다,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한다고 믿어온

기대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손해라는 단어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결로 다가왔다.


손해라는 말은 단순한 손실의 언어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당연한 몫으로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지 않으면 손해라는 말은 그래서 더 흥미롭게 들린다. 이 문장은 삶을 계산의 언어로 바꾸어 말한다.


인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면 본래 받아야 할 이익을 얻지 못한 셈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서 다시 질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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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로 즐거움을 보장받은 존재인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권리를 처음부터 약속받았는가.


나는 한때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 했고, 선택 앞에서는 늘 효율을 따졌다.


돌아보면 그 시기의 나는 꽤 분주했다. 남들보다 늦지 않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적어도 본전은 건지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 계산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늘 조급했고, 혹시라도 잘못 선택해 손해를 볼까 두려웠다.


병으로 인해 멈춰야 했던 일정과 포기해야 했던 계획을 떠올리면 처음에는 분명 손해처럼 느껴졌다. 건강도, 시간도, 일상의 리듬도 예전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잠시 멈춰 선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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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간은 손해인가.


그러나 병원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있던 어느 날,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만약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할 틈도 없이 다음 목표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멈춤은 손해가 아니라 방향을 다시 묻는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손해처럼 보였던 시간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손해를 다시 정의해보고 싶어졌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억지로 끌고 가는 시간이 손해일까. 아니면 나의 기준 없이 남의 기준을 좇느라 흘려보낸 시간이 손해일까.


어쩌면 손해란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같은 하루라도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면 덜 억울하고, 떠밀렸다고 느끼면 더 많이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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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인생을 이익과 손해로만 나누고 싶지 않다.

그러나 완전히 계산을 포기할 수도 없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을 가진 존재이고, 그 시간은 분명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손해를 피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기꺼이 손해를 감수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는 시간은 계산상 손해일 수 있어도 마음에는 남는다. 책을 읽고 사유하는 시간은 당장의 성과로 환산되지 않지만, 나를 조금 더 넓게 만든다.


책 속 고누마의 말처럼 놀지 않으면 손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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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고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손해라고.

실패를 두려워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진짜 손해라고.


이 하루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또 다른 계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안다. 손해를 두려워하기보다, 내가 선택한 방향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손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손해의 기준을 다시 정하면, 손해라고 믿어온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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