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미움이 아니라, 포기 하지 않은 나의 갈망이다.
새벽 여섯시.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의 찬 공기가 창문에 얇게 붙어 있다. 밤의 기운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이 시간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따뜻한 차를 한 잔과 함께 책상에 앉고, 누가 받을지 모를 나만의 편지를 써내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수요일의 편지>를 펼쳤다.
“꿈을 포기하고 일상을 푸념하고 일이 순조롭지 않은 것을 타인 탓으로 돌리고, 친구를 질투하는 자신을 싫어한다.
이거야말로 그대로… 내 얘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내가 책망 받는 기분이 들어서 약간 가슴속이 까끌거렸다.”
수요일의 편지 중에서 -195page
이 문장을 읽고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다가 잠시 웃음이 나왔다.
질투란 남이 잘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을 미워하거나 시기함. 혹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때 생기는 시샘이라고 적혀 있었다.
질투라는 단어는 하나인데, 그 안의 결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미워하거나 시기함’은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상대를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반면 ‘시샘’은 조금 다르다.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감정에 가깝다. 괜히 서운하고, 괜히 비교하게 되고, 설명하기 어려운 까끌거림이 생긴다.
미움이 밖으로 향하는 감정이라면,
시샘은 안에서 움트는 감정에 가깝다.
이 차이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왜 우리는 젠슨 황이나 일론 머스크, 이재용 회장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멀리 있다. 현실감이 없다.
그들의 성공은 나와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의 승진 소식, 지인의 성취, 함께 출발했다고 믿었던 누군가의 앞선 발걸음은 묘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질투는 거리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멀면 생기지 않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생긴다.
질투는 결국 비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비교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내가 나 자신만을 기준으로 살 때는 질투가 줄어든다.
그러나 누군가와 나를 나란히 세우는 순간, 마음은 저절로 계산을 시작한다. 나는 얼마나 왔는지, 저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그 계산이 어긋나는 순간, 질투는 조용히 올라온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인간적인 결핍에서 시작된다. 관심을 받고 싶다는 마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그 안에 있다.
그렇다면 질투는 악의라기보다 갈망에 가깝지 않을까.
질투를 느끼는 대상이 대부분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가 간다. 가까운 사람은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은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닿지 못한 자리를 보여준다. 그래서 아프다. 그래서 까끌거린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타인의 속도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나는 잠시 멈춰 서 있었고, 다른 이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분명 질투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들의 실패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나도 다시 걷고 싶다는 바람에 가까웠다.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질투는 상대를 향하지만, 시샘하는 질투는 결국 나를 향한다. 나는 왜 저 자리에 서고 싶어 하는가. 나는 왜 저만큼 인정받고 싶은가.
그 질문을 정직하게 마주하면 질투는 조금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질투를 완전히 밀어내고 싶지 않다. 대신 그것을 조금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싶다. 그 감정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는지 묻고 싶다.
질투가 미움으로 변하지 않도록, 시샘이 자책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그 안에 숨은 나의 욕망을 읽어내고 싶다.
어느 덧 어둠이 창밖은 옅어지고 커튼 사이로 흐린 회색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수많은 관계를 살아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타인을 향한 독으로 쓰지 않고, 나를 단단하게 하는 연료로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나는 ‘질투’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질투는 미움이 아니라, 포기 하지 않은 나의 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