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1.오늘은 아내의 말을 오랫동안 들어주었다.

by 마부자

오후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 전 회사에서 있었던 실수로 인해 오늘 사유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사유서를 처음 써보는 것이라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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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조금 익숙한 일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로 사유서를 써보기도 했고, 또 받아보기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단히 초안을 정리해 아내에게 보내주었다.


사유서라는 것은 직장인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문서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인사평가 제도가 있는 곳이라면 그 종이 한 장이 마음에 적지 않은 무게로 남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기록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이후의 시간을 걱정하게 만드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름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며 큰 실수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시간을 가졌던 아내에게 이번 일은 생각보다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사유서를 쓴다는 일은 단순한 행정 절차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나는 아내의 회사로 향했다.


오늘 같은 날은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함께 바람을 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잠시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온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오늘 내가 여기 온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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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회사 근처 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걸었다. 바람이 조금 차가웠지만 걸을 만한 날씨였다. 그렇게 걷다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내가 말했다.

“오늘은 사람이 좀 많은 데 가고 싶어.”


그러면서 매월 1일과 6일에 열리는 인근 5일장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시장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노점마다 음식 냄새가 올라왔고, 상인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채소와 과일, 생선과 반찬들까지 없는 것이 없는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며 만들어내는 소리 속에서 묘하게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이것저것 구경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을 걷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골목 안쪽 포장마차에 자리를 잡았다.


잔치국수와 두부김치를 주문했다. 김이 올라오는 국물에서 따뜻한 냄새가 났다. 우리는 그렇게 앉아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아내가 말했다.

“막걸리 한 잔 마셔도 될까?”


평소 같으면 술은 절대로 안 된다고 말했을 것이다. 건강을 생각하면 여전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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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예전에는 소주 세 병도 거뜬히 마시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막걸리 한 병만으로도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취기가 조금 올라온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사람들 이야기, 마음에 걸렸던 말들. 하나씩 천천히 꺼내 놓았다.


예전에는 직장에서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서로 술친구가 되어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물론 술이 없어도 대화를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직 그 방식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내의 이야기는 꽤 길었다.


최근 회사에서 조직 변경이 있었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은 회사에서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에서도 우리의 대화가 예전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아내가 그저 회사 일이 힘들어서 그런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집에서도 대화가 줄고, 회사에서도 대화가 줄어들면서 아내의 하루는 점점 조용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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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줄어들면 삶의 재미도 함께 줄어든다.


나는 그 사실을 오늘 시장의 포장마차에서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막걸리 잔을 내려놓은 아내의 얼굴에는 조금 전보다 편안한 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아마 오늘 아내에게 필요했던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마음속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시간 하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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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 시간에 감사했습니다.

시장에서 집까지 3km를 함께 걸으며 대화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시장에서 사온 토마토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이전 10화0310.작은 불편이 남긴 생각, 편리함이라는 아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