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은 시작이 아니라 낡은 나를 깨뜨릴 때마다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봄비가 지나간 뒤의 새벽은 맑고 차가웠다.
밤새 세차게 창을 두드리던 빗소리는 멈췄지만
찬 바람이 창을 흔들고 있었다.
거리 나뭇가지들은 붉고 하얀 옷을 벗고 초록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반짝 추워진 공기는 계절이 아직 완전히 제 자리를 잡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무언가를 읽기 위해서라기보다
무언가를 통과하기 위해 펼치는 시간처럼
느껴지는 순간, 데미안의 문장 중 너무도 유명해서
오히려 쉽게 지나치기 쉬운 한 문장이 내 눈을 붙들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데미안 중에서 - 122page
이 문장을 읽으며 오늘 내가 붙들고 싶어진 단어는 탄생이었다.
탄생은 보통 기쁜 말로 받아들여진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
즉 누군가의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빛 같은 장면이랄까.
우리는 대개 탄생이라는 단어에서 밝고 환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데미안의 문장 속 탄생은 그런 얼굴만 하고 있지 않았다.
탄생은 부서짐을 동반하고 있었다.
투쟁과 깨뜨림 그리고 익숙한 세계와의 결별이 있었다.
그 문장을 읽으며 탄생이란 결국 아름다운 시작이라기보다 아픈 통과에 더 가까운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알은 새를 지키는 껍질이지만 동시에 새를 가두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 안은 안전하다.
밖을 몰라도 살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알 안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새는 끝내 날지 못한다.
보호막은 어느 순간 감옥으로 바뀌고, 익숙함은 어느 순간 성장을 막는 벽이 된다.
그러니 탄생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결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깨지지 않으면 태어날 수 없고, 떠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나는 살아오면서 탄생이라는 말을 지금껏 잘못 이해해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세상에 처음 나오는 순간에만 허락되는 단 한번 뿐인 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 태어나고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여러 번 자기 자신을 다시 낳으며 사는 존재에 더 가깝다.
어제의 나로는 더 이상 오늘을 살아낼 수 없을 때가 있고, 익숙한 마음으로는 새로운 시간에 건너갈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 안의 오래된 세계 하나를 깨뜨려야 한다.
생각을 깨고.
습관을 깨고.
두려움을 깨고.
때로는 내가 나를 바라보던 방식까지 깨뜨려야
다음 단계로 건너갈 수 있고 그런 순간들을 지나며
사람은 조용히 다시 태어난다.
내 삶에도 그런 탄생의 순간들은 기쁨의 얼굴로 오지 않았다. 대부분은 상실과 두려움과 혼란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내가 당연하게 믿고 있던 일상.
내가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질서.
처음에는 그저 무너뜨리기 위해 온 것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그런 경험 앞에서
나는 알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주 큰 소리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더 두려운 균열이었다.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는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의 침묵 같은 것이었다.
탄생은 그래서 낭만적인 말이 아니다.
사람은 흔히 새로운 나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전의 나를 놓는 일을 훨씬 더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답답하고 불완전해도
익숙한 세계는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반면 깨고 나가야 하는 바깥은 늘 불확실하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고,
내가 그 세계를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니 탄생은 용기의 언어이기 전에 불안을 견디는 언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 모른다.
무서운데도 나아가는 것.
알 수 없는데도 부딪히는 것.
그것이 탄생의 본질 가까이에 있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내가 얼마나 익숙한 세계에
기대어 살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건강은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일상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조금만 애쓰면 지금의 평온은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순순하지 않았다.
그 믿음들이 깨지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 보게 되었다.
그 시간은 너무 힘들었지만
동시에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시간이었다.
전과 같은 순진함으로는
세상을 볼 수 없게 되었고,
전과 같은 속도로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를
이전보다 훨씬 무겁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예전보다 더 자주 멈추고,
돌아보고, 감사하게 되었다.
그것이 성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성장이라는 말보다 탄생이라는 말이 더 가까워 보인다.
이전의 내가 조금 나아진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마음의 구조를 가진 사람으로 옮겨온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일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타인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고,
자기 자신을 다루는 태도 역시 달라지는 것.
데미안의 문장을 읽으며 바로 그 장면을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탄생은 찬란한 결과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가두고 있던 세계를 깨뜨리며
끝내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존재의 가장 치열한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이고 그렇게 다시 태어나며 자기 삶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탄생’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탄생은 처음의 시작이 아니라 낡은 나를 깨뜨릴 때마다 반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