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배움은 세상을 아는 일 이전에 내 안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일이다.

by 마부자

보내는 겨울의 아쉬움일지,

다가오는 봄의 반가움일지 모를 비가

새벽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봄비가 오는 새벽 창밖에는 떨어진 벚꽃잎들이

마치 늦은 눈처럼 바닥에 쌓여 있었다.


사라지는 계절의 흔적과 다가오는 계절의 기운이 한 장면 안에 함께 놓여 있는 듯.

잠시 눈을 감고 짧은 명상을 한 뒤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데미안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 내 시선을 오래 붙든 문장은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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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그들 하나하나 속에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지.


그러나 각자가 그 가능성들을

예감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심지어

그것들을 의식하는 것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그 가능성들은 자기 것이 된다네.”

데미안 중에서 - 141page


배움은 너무 익숙한 단어라 오히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기 쉽다.


누구나 배운다고 말하고 누구나 배우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실제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배움 안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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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법을 배우고.

말을 배우고.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우고.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배운다.


그런 의미에서 배움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조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단어를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배움의 내용보다

배움의 태도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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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배우지만

모두가 같은 사람으로 자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남는 것이 다르고

같은 일을 겪어도 받아들이는 깊이가 다르다.


이 차이는 지능의 문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경험의 양만으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웠느냐보다

어떻게 배우고 있느냐에 더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배움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들여와 자기 것이 되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움은 결과 이전에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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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저마다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그냥 주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예감하고 의식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을 스스로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아본다 해도 그것을 끝까지 자기 삶으로 끌고 오는 사람은 더 적다.


결국 인간은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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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그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같은 것이다.


살아오며 배움이 결코 젊은 시절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배움의 태도는 더 중요해진다.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 방식에 익숙해지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틀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그럴수록 배움은 더 어려워진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지고 익숙한 해석에만 기대게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굳어지기도 한다.


나는 배움의 반대말이

무지가 아니라 굳어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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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더 배우지 않으려는 마음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배우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배우기를 멈춘 사람은

아직 많은 시간을 살아도 이미 닫힌 사람처럼 보이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배움이 태도라는 말은 결국

내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가 곧 나를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늘 내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을 배우는지는 전적으로 내 몫이다.


누군가는 상실 속에서 원망만을 배우고

누군가는 그 상실 속에서 더 깊은 사랑을 배운다.


누군가는 실패를 통해 자기 한계를 핑계로 삼고 누군가는 그 실패를 통해 자기 가능성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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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배움의 핵심은 환경이 아니라 반응에 있다.


무엇이 내게 일어났는가보다 그것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를 선택하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 말은 책임을 무겁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 삶이 완전히 주어진 운명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배우려는 태도를 잃지 않는 한 사람은 계속 달라질 수 있고 계속 깊어질 수 있다.


나는 ‘배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배움은 세상을 아는 일 이전에 내 안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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