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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Nov 30. 2019

『야바위꾼』

M은 자신이 방에 들어와있음을 깨달았다. 방은 짙은 갈색의 벽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창문 대신 환풍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방의 중앙에 탁자와 의자가 있음을 알고 거기에 가서 앉았다. '내가 왜 여기 앉을 생각을 했지?'하고 생각하는 순간, M은 퍼뜩 탁자 위에 말판과, 반대편 의자에 어떤 사람이 앉아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람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이 안 갔으며, 주름은 많았지만 얼굴에는 이상하게도 생기가 돌아 나이도 알 수 없었다. 그러곤 말판에 눈이 갔는데, 말판은 수많은 정사각형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각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언어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손에서 딸그락딸그락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M은 이내 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그 사람은 순간 비웃는 표정을 짓는 듯했고,(이때 M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M에게 되물었다. "자네는 내가 뭐라고 불리길 원하나?", M은 대답했다. "제가 그걸 정할 수 있나요?", 그 사람은 짧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나한테 처음부터 존댓말을 썼네. 근데 누가 자네보고 나한테 존댓말을 쓰라고 정해주었나? 그런데도 자네는 존댓말을 썼어. 그럼 왜 내가 뭐라고 불릴지에 대해서는 정할 수 없나? 하긴 이름이니, 내가 누구니,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M은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고 그 사람한테 말했다. "저... 소리가 거슬리네요." 그 사람이 사과했다. "아 미안하네." 그 사람은 손에 쥔 것을 말판에 내려놓았고, 그것은 두 개의 주사위였다. 그 사람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는 이 말판과 주사위가 어디에 쓰이는지 궁금한가 보군. 이 말판 위에 자네가 알아볼 수 있는 글자를 찾아보게." M은 말판을 살펴보았고 중간쯤에 'UNIVERSE'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여기 있네요. UNIVERSE라고 적혀있는 여기요." M은 UNIVERSE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그 사람은 그것을 보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생각이 난 듯 웃으며 말했다. "오 자네는 UNIVERSE에서 온 게로군. UNIVERSE 중에서도 정확히 어디 출신인가?" M이 대답했다. "무슨 출신을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전 ㅇㅇ 출신인데요.(M은 자신의 조국을 말했다.)" 그 사람은 천장을 보며 생각을 하는 듯했다. "ㅇㅇ이라, ㅇㅇ... 아 지구에서 왔구만! 어떻게, 그곳은 살만한가?" M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그럭저럭 살만한 것 같기도 하고..." 그 사람이 M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럼 됐네. 자네 앞에 있는 이 말판이 바로 '세계'라네. 뭐 정확히 말하면 세계들의 집합체지. 그중에서도 자네는 'UNIVERSE'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거고. 다른 단어들도 자네의 UNIVERSE가 가진 뜻과 비슷한 의미의 단어들일 걸세." M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당신은 '신'인가요?" 그 사람은 또다시 비웃는 듯했고 M에게 말했다. "내가 '신'인지 아닌지가 그리 중요한가? 여기 오는 모두가 하나같이 그렇게 묻더군. '당신은 '신'인가요?' 하고" 그 사람은 큰 소리로 웃었고, M은 왠지 자신이 한 질문이 부끄러웠다. 그 사람은 이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부터라도 그렇게 질문할걸세. 자네 같은 입장이라면..." M은 '입장'이라는 단어가 무척 신경 쓰였고 그 사람에게 질문했다. "그 '입장'이란 게 정확히 뭐죠?" 그 사람은 주사위를 하나 집으며 말했다. "이거지. '인과율' 말이네. 자네는 인과율에 묶여있는 처지란 말일세." M은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인과율에 묶여있지 않나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 나는 주사위를 굴릴 뿐이니까. 뭐 왜 주사위를 굴리냐고 하면 그것도 인과율 아니겠나." M은 잠시 생각에 잠겼고 다시 그에게 질문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주사위를 굴리는 것에 따라, 이 수많은 세계가 변한다는 것인가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그렇다네. 근데 자네 표정은 왜 그런가? 내가 해선 안될 말을 했나?" 실제로 M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제가 사는 지구에서는 하느님이 보살펴준다느니, 인간은 신이 진흙으로 구워서 생겨났다느니, 그런 말들이 있는데요?" M은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공격적인 어투로 얘기했다. 그 사람은 또다시 큰 소리로 비웃었고 너무 웃기다는 듯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보아하니 자네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눈치군? 뭐 그렇다면 그렇게 믿도록 하게. 그것도 나쁘지 않지." M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나쁜 짓을 하면 천국에 간다느니 최후의 심판이 도래한다느니 하는 것들은 다 거짓인가요? 저도 종교는 안 믿지만 제가 사는 지구에서는 이 종교에서 규율이 태어나는데요? 그러면 그런 규율도 다 거짓인가요?" 그 사람이 대답했다. "자네도 보다시피 세계는 단지 인과율이 작용되는 무대일 뿐이라네. 그렇다고 해서 자네 고향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게 부정되는 건 아니겠지. 그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모르고, 또 그렇게 믿고 싶다면 뭐 그런 거 아니겠나? 근데 그 사람들이 자신이 떠받들고, 삶의 기준으로 삼았던 존재가 한낱 주사위나 굴리고 있다는 걸 알면 무슨 심정일 것 같나? 사실 난 그 생각에 하루에도 수없이 웃는다네." M이 그 사람을 비꼬았다. "하긴 신이 주사위나 굴리는 사람인 걸 알면 실망하긴 하겠군요." 그 사람은 M의 말을 듣자 비웃음을 뚝 그쳤다. "내가 신이라고? 자네들 입장에선 그럴 수 있지만 자네들이 상상하는 신은 전지전능한 신 아닌가? 보다시피 난 전지전능하진 않아. 주사위만 굴릴 뿐이지. 그래도 자네들 언어 중에서 제일 근접한 말은... 가만있자..." 그 사람은 골똘히 생각한 뒤 주먹으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야바위꾼'이 있군그래!" 그 사람은 대화하던 중 가장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고, M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게 그리도 웃긴가요?" 그 사람은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벌써 가려고 하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네. 내가 맨날 주사위만 굴리다가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 너무 들떴나 보네. 그럼 조심히 가시게. 다시 또 볼 날이 있지 않겠나? 그것도 주사위에 달려있는 거지만..." 그 사람은 말끝을 흐리며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M은 방에서 나오다 말고 잠시 그 사람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그 사람은 '아 이번엔 무엇이 나올까?'하는,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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