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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Dec 03. 2019

『관객과 영사기』

 그는 인간에게는 오직 두 가지의 삶의 방식이 허용된다고 하였다. 관객으로서의 삶과 영사기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그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관객으로서의 삶이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삶은 하나의 여행이다.'라고 할 때 강조하는 삶의 태도로서 삶을 살아가면서, 즉 자신을 둘러싼 세계나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평가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은 '풍경'이라는, 영화의 일부분을 감상하며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관객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관객으로서의 삶과 달리 영사기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은 주변 환경이나 자기자신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생각도 가질 수 없다. 단지, 그가 존재해야만, 즉 그가 그를 둘러싼 어떤 것을 인식해야만 그것이 존재하는, 마치 관객에게 어떠한 이미지를 보여줄 뿐 그 자신은 그 이미지에 대해 어떠한 평가도 내릴 수  없는 영사기로서의 삶을 그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를 또다시 들자면, 만약 영사기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이 풍경을 본다면 그는 그 풍경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평가도 할 수 없다. 단지 그 풍경을 이미지로서만 받아들일 뿐이며 더 나아가 그 사람에게 있어서 풍경이라는 것은 단지 이미지로서 그 사람이 바라봐야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 사람은 풍경을 비추는 것일 뿐이다.

 그는 저 두 가지의 삶의 태도는 각자 장단점이 있다고 했다.

 관객으로서의 삶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인식하며 세계의 아름다움, 자기 자신의 고귀함, 타인에 대한 사랑 등을 느낄 수 있지만 동시에, 영화라는 것이 아주 넓은 의미에서 인간에게 항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아니기에, 이 세계에 대해 혐오감, 자기 자신에 대한 불쾌함 등을 느낄 수도 있다. 그는 그 불쾌감 중에서도, 영화가 상영되는 저 큰 스크린이 불러일으키는 중압감이 제일 싫다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한 것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없어서 그에게 다시 질문했지만 그는 나에게 그 중압감이란 사람이 거울을 보면 느낄 수 있는 왠지 모를 불쾌함과 비슷할 수 있을 것이라고만 했다.

 영사기로서의 삶은, 그가 말한 중압감이나 불쾌감을 느낄 일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세계와 나 자신이 주는 쾌감도 느낄 수가 없다. 그는 또한 그중에서도 영사기로서의 삶을 살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느낄 수가 없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영사기는 자신이 비추는 영화를 느낄 수 없을뿐더러 관객과는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느낄 수 없다. 영사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혹은 그가 말한 의미에서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년기에는 주로 관객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가 다른 관객들과는 달리 감성적이어서 그런지, 혹은 그가 보는 영화만 유독 슬프고, 무서운 영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영사기로서의 삶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의 순간이 언제였는지는 그가 정확히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내 짐작으로는 그가 매우 무료하고 따분한 시기에, 즉 더 이상 영화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 때이리라. 그 깨달음의 순간에 그는 매우 흥분되면서도 동시에 내적 갈등을 겪었다고 했다. 그는 그에게 있어서 관객으로서의 삶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관객으로서의 삶은 견디기 어려웠고 또 그렇게 살다가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내적 갈등을 겪으며 그는 해결책으로서 한 가지 결심을 했다고 했다.

 바로 일상생활을 할 때는 영사기로서의 삶을 살고, 일상생활 중에 여유가 있을 때에는 관객으로서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분명 '돌아가자'라는 표현을 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그가 관객으로서의 삶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다음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그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그는 앞서 말한  결심을 잘 이행하였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관객으로서의 삶을 살 것이고, 영사기로서의 삶은 자신에게 있어서 본질적인 삶이 아니라는, 바로 그 결심 말이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관객으로서의 삶을 자기도 모르게 멀리 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잘못인지 혹은 그 일상생활이라는 것의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점점 영사기로서의 삶을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마음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너무도 슬펐다고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그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관객으로서의 삶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라고 질문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나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관객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때가 아주 가끔은 있다고 하였다. 바로 담배를 필 때였다. 실제로 나는 그가 혼자서 담배를 필 때, 멀리서 그를 바라보노라면 그가 다른 사람인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그는 자신이 담배를 피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인지, 혹은 실제로 그러한 것인지 점점 헷갈려온다고 했다.

 그는 담배를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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