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맥가 Sep 15. 2020

일의 가치를 찾아가는 법

디자이너를 위한 몇 개의 이정표

하루하루 디자인을 하다 보면 어느 날인가 문득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 처음 디자인을 시작하며 느꼈던 흥미와 재미를 잃고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또는 '나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갖가지 회의감이 찾아옵니다. 더욱이 단순 반복 업무에 치여 살고 있는 주니어라면 이런 고민들이 빠르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찾아옵니다. 경험이 많아 이골이 난 시니어들도 이걸 피해 가긴 쉽지 않습니다. 큰 파도 없이 고여있는 물 위에서 반복적으로 노를 젓다 보면 누구나 타성에 젖기 마련이니까요.


궁금할 것도, 어렵지도 않은 그리고 재미 또한 없어져 한 없이 익숙해진 상황.


쇼핑몰 업체에서 반복적으로 상세페이지, 간간히 기획전들을 반복해서 치다 보면 위와 같은 상황을 꽤 빠르게 겪게 됩니다. 대행사의 배너, 랜딩페이지 작업 그리고 페이스북 등에 올라갈 포스팅 이미지 제작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지겨워집니다. 뭔가 난이도 있고 거창한, 규모 있는 작업을 하고 싶은데 상황이 그러지 못합니다. 또한 에이전시에서 구축 업무를 하고 있어도 결국 언젠가는 겪게 됩니다. 살아가며 누구나 한 번쯤은 꼭 소나기를 맞는 것처럼.


"과연 이것이 내 경력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이직을 고민합니다. 쉽지 않죠. 쌓여있는 작업물이 죄다 그런 것들이라 세부 포지션을 변경하고 싶어도 막상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달리 방도가 없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그 안에서라도 일하는 가치를 찾는 게 최선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가치를 잃는 것. 목적 또한 함께 잃습니다.


부족함 없이 자라던 어느 날. 가세가 기울고 그것이 장기화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밥상머리에 앉아 부모님 앞에서 투정을 부리던 제게 나의 어머니가 따끔한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성우야. 감사한 줄 알고 살아야지! 밖에 나가서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 많아!"


지금보다 훨씬 철없고 오만한 저였던 터라 되받아칩니다.


"엄마. 그럼 하루 종일 고개 쳐 박고 밑바닥만 치다 보며 살까? 그렇게 살면 좀 나아져?!"


살아보니, 어느덧 나이를 먹어 가장이 되다 보니 제가 그리 버티고 있더군요. 어머니의 충고처럼 말이죠. 이미 제가 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고, 이 이상 올라갈 자신이 없거든요. 꽤 현실적이고 명확한 방법입니다.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디자이너를 꿈꾸며 살아가고, 그게 누구든 실무를 지내고 있는 자라면 최소한 다른 누군가의 꿈을 이룬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이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나는 하고 있으니까요. 잔인하지만 그리하면 좀 나아집니다. 내일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어느 누구에겐 작은 소망이 됩니다. 아니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이루지 못하는 큰 소원이 됩니다. 지병인 심장병으로 비행기를 타지 못해 해외여행 한번 못 가고 돌아가신 나의 장모님처럼 말이죠.


잡무처럼 느껴지는 배너 작업. 사소해 보이는 팝업이나 해도 티도 안나는 아이콘 작업 등. 리드 디자이너가 하기 싫어 나에게 던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들은 크고 좋은 것. 포트폴리오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 쌓아가고 제겐 쭉정이 같은 것들만 줍니다. 주니어로 실무를 지내고 있다면 그러한 과정을 좀 더 오래 겪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더 큰 걸 하기엔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위의 아이콘 시안은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제 친한 동생이자 동료인 녀석의 작업물입니다. 원래 이런 걸 전문적으로 하던 친구도 아닙니다. 저런 게 몇십 개나 더 있고, 심지어 비슷한 모양의 베리에이션 작업물이 여러 개 있습니다. 이리해보고 저리 해보고 아이콘 하나에 나름의 다양한 시도를 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제가 요청한 적도 지시한 적도 없습니다. 시간이 남는 틈틈이, 언젠가는 사내 서비스에 적용할 거라며 하나하나 재미있게 만들고 있더군요. 작업하던 어느 날 제게 묻습니다.


"형 이거 좀 구린가? 다시 하는 게 낫겠지?"


하나하나 뜯어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 뱉어냅니다.


"아니. 이거 네 거잖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이콘 세트. 밀어붙이자."


결국 우리는 현 프로젝트에 해당 아이콘 세트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취향이요? 디자인적 값어치요?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이미지 소스 사이트나 온라인에 무료로 널려있는 아이콘들보다 수백, 수천 배 가치 있습니다. 적어도 제게 디자인의 가치는 그런겁니다. 조금 모자라더라도,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대중성을 지니지 않더라도. 기본에 충실해 그 쓰임에 문제가 없다면, 세상 단 하나뿐인 내가 만든 디자인. 그런 것들이 쌓여 언젠가 빛이 납니다.


쉽게 지칠 수 있는 실무에서 소소한 재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동생 놈을 보며 저를 되돌아봅니다. 어리석었던 그때의 밥상머리로 돌아갑니다.


"엄마. 나 오늘 그래도 회사에서 열심히 했어. 큰 회사도 아니고 내가 뭐 거창한 것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가 만든 무언가로 회사 사람들이 모두 월급을 받아가고 있고. 그들도 우리처럼 행복한 저녁을 보내고 있겠지."

 





작가의 이전글 설득에 의한, 설득을 위한 디자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