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이의 한마디에 ‘어? 이런 말도 할 줄 알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중에는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봤다는 어려운 단어가 포함될 때도 있고, 어른들이 한 말을 어설프게 기억해 엉뚱한 상황에 쓰는 경우도 있었다. 한 예로, 지방 소도시로 놀러 갔던 여름날, 아이는 KTX 창가에 비쳤던 초록 논밭이 아닌 아파트가 즐비한 거리를 보자 ”시골과는 딴청이네? “라는 말로 나를 한바탕 웃게 했다. 시골과는 딴판이라고 말했다면 이렇게 내 머릿속에서 조용히 잠수하듯 남아있다 가끔 떠올라 웃음 짓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아이가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함께 오고 가며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날도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맨 앞줄이었다. 나름 긴장하며 눈을 위로 뜨고 신호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호가 초록색 화살표로 바뀐 순간, 뒤에서 빠앙-하고 경적을 울린다.
“아니 저 택시는 무슨 신호 바뀌자마자 빵빵거리는 거야.”
”바쁜가 보지.”
나의 구시렁대는 말에 아이가 혼잣말처럼 얹은 말 한마디가 보신각 종을 치듯 내 머릿속에서 땡 하고 울렸다. 언제 이렇게 어른스럽게 말하게 된 건지, 아니, 어른보다 더 해탈한 듯 말하는 아이가 신기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덕분에 내가 사소한 일에 기분 상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잘못됐다고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손님이 있거나 화장실이 급해 아이말대로 바빠서 나를 재촉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성격이 매우 급한 사람이거나 내가 신호대기 중에 딴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신호가 바뀌자마자 나에게 알려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아이의 한마디 말로 나는 순간 상했던 기분은 잊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하지만 너무 이성적인 반응으로 잠깐 섭섭한 적도 있었다. 그날은 감기 기운이 있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진료 시간까지 30분도 채 남지 않아 초조한 마음을 안고 운전 중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신호란 신호에는 다 걸리고 말았다. 단지 내 운전이었기 때문에 속도를 내기도 어렵고 눈치게임이 필요한 비보호 좌회전도 해야 했다.
“아 오늘따라 신호마다 다 걸리네. 에휴.”
“신호는 죄 없어.”
신호는 죄가 없다는 말에 머쓱해졌다. 그리고 이내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신호는 죄가 없긴 하지만 누굴 위해서 이렇게 서둘러 운전하고 있는 건데, 조급한 마음을 안고 자동차 핸들을 잡고 있는 내 모습을 알아줬으면 했다. 한편으로는 콩 심은 데 콩 난다고, 평소 아이의 잘못이나 짜증에 대해 사실 위주로 설명하며 이른바 ‘팩폭’을 날리는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서운함과 체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안은채 진료를 마치고 진료실 옆 하얀 벽을 따라 들어가니 동그란 의자 네다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 앉아 벽에 걸려 있는 투명 마개를 코와 입에 대고 있으라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을 들은 아이는 처음 보는 투명 마개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묻는다.
“엄마. 이거 코에 대고 있으면 뭐가 좋아?”
“호스를 따라 나오는 연기에 약이 들어있는데, 숨 쉬면서 그걸 코로 들이마시면 몸속에 더 잘 들어가서 감기가 빨리 나을 수도 있대.”
“우와. 연기 나온다. 세상 정말 좋아졌구나.”
아뿔싸. 이건 할아버지나 할머니한테서 들은 건가. 아이가 즐겨보던 만화 중에 이런 대사를 할만한 캐릭터가 있었나.
아이의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한 간호사 선생님 앞에서 나도 웃음을 지었지만 머릿속은 아이 말의 출처를 생각하느라 분주했다. 다행히 아이는 어른들의 반응에 민망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비스러워 보이는 연기에 정신이 팔려 추가 진료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날 밤, 자려고 누운 아이가 뜬금없이 말했다.
“엄마. 오늘 병원 데려가줘서 고마워.”
엄마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보다 신기한 연기를 보게 해 줘서 고맙고 재밌는 경험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의미인 것 같았지만.. 난 어쨌든 고맙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고마움을 느낀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을 느끼고 입 밖으로 표현해 냈으니까. 그리고 나도 대답했다. “고맙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신기한 연기 구경했어.”
연기 이야기로 평소보다 30분은 더 늦게 잠이 들었지만 이렇게 우리만의 추억이 쌓이는 것 같아 이불속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