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정신없이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니 자잘한 집안일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쌓인 설거지와 빨래, 널브러진 장난감, 흐트러진 이불. 화장실 곳곳에 물때는 어쩌면 그렇게 부지런히 잘도 끼는지. 출퇴근에 바쁠 땐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처리했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주말에 몰아서 한 건지, 흐린 눈으로 애써 외면하며 잠들고 나가기만 바빴던 건지. 아마 둘 다였으리라.
집안일을 해보니 하려면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티가 나지 않고 치우고 돌아서면 눈 깜짝할 새에 다시 어질러져 있다 (애석하게도 과장 없는 사실이다. 미성년 자녀를 키운다면 알 것이다). 집안일하다 끼니 챙겨 먹고 치우고 잠시 쉬면 또 금방 아이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러다간 매일 집안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전업주부의 삶이 아닌 전업주부로 ‘이직’했다 생각하며 내 ‘업무’를 하나씩 적어보았다. 월급도 회식도 없는 나만의 ‘직장‘에서 할 일은 제때 처리하고 나 자신도 잃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다 우연히 루틴에 대해 이야기하는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다. 내가 들었던 회차는 ‘루틴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로 루틴을 설정하는 과정에 대해 소개한 첫 번째 이야기에 이어 루틴을 한 달 이상 지속해 본 결과에 대해 공유하는 회차였다. 생활 속 루틴을 정하고 지키는 일은 단순한 행동으로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한마디로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일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물 한잔, 자기 전에 코세척 한 번 등은 간단하지만 면역력을 손쉽게 높일 수 있다. 아이의 등원 후 바로 앉아 30분 글쓰기나 점심 먹을 땐 짧은 미드 자막 없이 한편만 보기와 같은 루틴은 내 일상을 더 풍족하게 해 준다.
팟캐스트의 사회자는 루틴을 지키기 시작한 첫 주는 미션완료할 때마다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하는 재미로 버티다 둘째 주부터 고비가 왔다고 한다. 익숙하지 않았던 새벽 기상을 루틴으로 무리하게 넣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 외 독서시간이나 청소루틴을 지켰을 때 스스로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팟캐스트를 듣고 솔깃해진 나는 곧바로 루틴 정하기에 돌입했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먼저 나눠보니 집안일, 아이 케어 등이 해야 할 일로, 하고 싶은 일은 도서관 다니며 책 읽기, 브런치 멤버십 작가되기가 떠올랐다.
먼저 내가 해야 할 집안일. 식사 준비, 설거지, 바닥 쓸기와 같은 매일의 일들은 제외하고, 30분 이상 걸리는 집안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할 수 있도록 요일별 루틴을 정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에는 가전 청소. 청소기 분해 청소부터 광파오븐 클린모드 돌리기, 그리고 계절에 따라 에어컨 필터 청소나 가습기 내부도 닦아 바짝 말린다. 한 달에 한 번은 세탁조 청소와 건조기 내부살균도 필요하다. 이쯤 되니 우리 집에 식기세척기나 의류관리기 같은 다른 대형가전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술의 발전으로 편리한 가전이 다양해졌지만 그만큼 유지보수를 위한 노동도 늘어났음은 부정할 수 없다.
화요일은 ‘화’ 요일이니까 ‘화’ 장실 청소를 한다. 수요일엔 물걸레 밀대로 바닥을 닦고, 목요일엔 가구 먼지를 닦는다. 마지막으로 금요일엔 냉장고 정리를 하며 주말에 먹을 메뉴를 정하거나 새로 장 볼 리스트를 적는다. 나름 기억하기 쉽게, 너무 힘들지 않게, 루틴을 지킬 수 있도록 계획했다.
하고 싶은 책 읽기와 글쓰기를 위해서는 매일의 목표를 정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집안일처럼 시간을 정했더니 읽다가 또는 쓰다가 중단하는 게 영 찝찝하고 마음에 걸렸다. 책은 챕터를 하나 다 읽는다던지 내용에 따라 페이지수를 정해 자기 전까지 읽었다. 뒷부분이 궁금해 더 읽고 싶어도 참았다가 다음날 읽었다. 그러면 아침을 기다리게 되고,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시간을 정해 마냥 쓰는 것보다 다음 날 수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한 편 쓰는 것으로 목표를 정하는 게 약간의 압박감과 함께 부지런히 쓸 수 있었다.
물론 이 루틴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키기는 쉽지 않다. 몸이 아파 건너뛰는 날도 있을 것이고, 늦은 시간까지 외출하거나 여행을 간다면 모두 지키기 어렵다. 이때 중요한 건 나의 ’ 완벽한 루틴 달력‘에 빈틈이 생겼다고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빈틈은 빈틈대로 놔두고 다음 날 다시 새롭게 시작해서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된다. 빈틈이 잦아지면 루틴을 수정하면 그만이다.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 루틴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나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깨달았다. 내 달력은 여전히 군데군데 빈틈이 있다. 하지만 이전에 했던 집안일의 굴레, 사회에서의 내 역할은 무엇인지 같은 고민들은 점점 매워지고 있다. 산울림밴드의 김창완 님도 쓰지 않았는가, “찌그러져도 동그라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