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침내 Jan 28. 2023

초록체크외투

엄마의 청춘




계절보다 조금 앞서 물건을 정리한다. 말하자면 나만의 정기행사 같은 것인데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부하는 일이다. 제일 먼저 옷장을 열고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을 차례로 훑어본다. 눈에 띄는 것들을 꺼내 잠시 고민하는 척 둘러보고 한 쪽으로 내려 놓는다. 차례차례 꺼내고 다시 걸어놓기를 반복한다. 해가 거듭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한 계절 또는 한 해 입지 않거나 사용하지 않은 것은 다음 계절이 와도 손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옷뿐만 아니라 가방이나 모자 등 소품도 마찬가지다. 색이 좋아서 디자인이 좋아서 사들인 것들이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가방이 옷장 구석에서 ‘나, 멀쩡히 여기 있어!’라며 '툭' 발견되기도 한다.


@Priscilla Du Preez ��출처Unsplash



겨울을 맞아 여느 때처럼 물건을 정리하던 중 오래된 초록색 체크무늬 외투가 눈에 띄었다.  옷장 제일 끝에서 시간을 고스란히 담은 채 걸려 있다. 소매 끝은 낡았고 보풀을 온통 뒤집어썼다. 물론 처음엔 빵빵한 누빔과 선명한 색을 가지고 있었고 가벼웠으며 따뜻했다. 겨울만 되면 제일 먼저 손에 잡히는 겉옷이었다.



이옷을 처음 만난 날은 10년도 넘은 어느 겨울이었다. “경! 이거 입을래?” 엄마가 옷을 들어 보이며 내게 물었다. 직접 입으려 했는데 너무 크다며 내미는 옷을 받아 들었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오른팔을 집어넣고 남은 팔 한쪽을 넣으며 샀냐고 물었다. 거울 앞에 서서 주머니에 손도 넣어보고 뒤도 돌아보며 이 옷의 출처가 어딘지 확인하려고 할 때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 만들었어. 천이 있는데 좋아 보이고 아까워서 만들어 봤어.”


대답을 듣는 순간 내 고개는 빛의 속도로 돌아갔다. 작은 재봉틀로 머리끈이나 화장품 주머니 같은 소품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원하는 크기를 이야기하면 받침이나 덮개를 만들어 주신다. 그런데 옷을 만들어?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지 않은가.


올록볼록한 마름모 형태의 누빔모양을 가진 모직천은 손끝으로 건드리면 터질것처럼 빵빵했다. 안감은 기모로 되어있어 포근했고 보기와는 다르게 아주 가벼웠다. 반코트 길이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형태도 마음에 들었다. 소매끝은 시보리 처리가 되어있어 손목을 가볍게 조여주어 안정감도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입었을 때보다 내가 입었을 때 보기 좋게 맞았다. 임자는 따로 있다면서 챙겨 돌아와 몇 해동안 열심히 입고 다녔다. 박음질이며 모양이며 어느 하나 기성품보다 못하지 않았다. 옷 샀냐는 물음에 엄마가 만들었다고 하면 모두 믿기지 않는다며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옷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으나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 이후 생계 수단의 선택은 다른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이었다. 젊음과 중년의 시기와 바꾼 시간에 자신만의 기술이 생겼고, 좋아 보이는 원단을 발견하는 안목도 생겼다. 그렇게 도안도 없이 만들어 낸 엄마의 작품이 초록색 외투다. 낡고 해졌다는 이유로 옷장에서 걷어내 다른 옷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어딘가로 보낼 수 없는 이유다. 그 외투엔 엄마의 한때가 함께 들어있다.


사라질 것들의 정리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꺼내 몽글몽글한 보풀을 제거기로 관리한다. 탁, 탁 털어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다시 같은 자리에 걸어 두는 것으로 엄마의 청춘을 함께 보관한다. 따듯함이 사라져 예전처럼 한겨울에 입을 수는 없지만, 아직도 춥지 않은 날 동네 산책하러 나갈 때는 한 번씩 꺼내 입는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입고 있으니 여전히 내겐 소중한 물건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날의 그림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