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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Mar 05. 2020

녹사평 우리 집 이야기

인복 좋은 사람이 만난 하우스메이트


타고났다고 자부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복이다. 어릴 때 친해진 친구, 아르바이트하다 만난 대표님, 기숙사 룸메이트, 인턴 하던 회사에서 만난 사수 언니, 신입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만난 동기, 동료들까지.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했던 적은 거의 없다. 그들은 어리바리한 나를 잡고 더 쉬운 길을 알려줬다. 표정이 안 좋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줬다. 오히려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만 수두룩하게 만났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같이 사는 사람과 잘 맞을 확률은 희박하다. 가족도 아니고 완전 남인데, 하루 한 시간만 떠드는 사이도 아니고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한다면, 머리를 아침에 감는지, 담배는 피우지 않는지, 청소는 매일 하는지, 밤에 야식 먹는 건 좋아하는지, 맞춰가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닐 테다.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살다 보면 정이 뚝 떨어진다고들 하니.

나는 집에 와서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 하루 종일 많은 사람은 피곤하다. 집에 오면 혼자 침대에 앉아있는 게 일상이다. 지극히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편이라 "왜 혼자 살진 않고?"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혼자가 좋지만 혼자는 싫다. 밤의 적막이 두렵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ㄱ으로 시작하는 두 단어의 괴생명체를 상상하기 시작해 새벽까지 뜬 눈으로 있기 마련이다. 룸메이트랑 살던 방에서 난 괜찮다고 외박하러 나가는 친구를 배웅한 날 무서워서 몇 시에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지금 사는 녹사평 집은 작년 2월부터 살았으니 딱 1년이 되었다. 방이 세 개인 집에서 혼자 사는 언니의 방 하나를 빌려 살게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파란색 신발장을 마주친 그 순간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생각했다. 은은하게 피워둔 향초와 티브이 옆에 무심하게 놓여있던 빈티지 포스터까지 아직도 그 첫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바로 그전에 한 참을 걸어 올라갔던 해방촌의 집에서는 플라스틱 서랍장이 들어선 노란 장판의 방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고 나왔는데 말이다.

언니는 나랑 같이 사는 걸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말만 들었을 때는 괜찮은 것 같다. 왜냐하면 나를 이렇게 칭찬해주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인사를 하면 "어쩜 그렇게 환하게 웃니? 나중에 너랑 사는 사람은 아침마다 행복하겠다."하고, 한동안 이상한 사람을 만났을 때는 "너 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평생에 이런 사람을 한 번이나 만날 수 있을지 몰라서 그래"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로해줬다. 종종 방을 정리해줄 때면 너무 고마운데, 오히려 "네 물건을 만지는데도 뭐라고 안 해서 고마워. 너 같은 사람 정말 흔치 않아"라고 해준다. 자존감이 떨어지려야 떨어질 일이 없다.

집을 가꾸는 건 언니의 취미다. 한 달에 한 번은 집 구조가 바뀌어 있다. 지난번에 러시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방 한쪽은 민트색 벽이, 한쪽은 회색이 되었다. 거실의 티브이는 흰색 수납장 위에 있다가 어느 날은 그레이 색으로 바뀌어있다. 곳곳에는 화분이 있는데, 종종 새로운 식물 가족을 맞이한다. 화분 두 개를 옆에 둔 알록달록 쿠션이 올라간 흰색 소파, 민트색 벽지, 파란색 신발장의 거실을 보고 있으니 그렇게 살고 싶었던 미드 센츄리 모던 스타일의 집에 이미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제는 작은 방에서 큰 방으로 옮겼는데, 3시간 만에 뚝딱 새로운 방이 나타났다. "서랍이랑 책상을 일자로 두면 재미없어. 책상이랑 수직으로 두자." 하더니만 책상 뒤로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귀여운 게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넌 검은색이야." 하더니 부엌에서 쓰던 검은색 서랍을 내 방에 옮기고 검은색 액자의 빈티지 포스터를 위에 툭 걸쳤다. 흰색 서랍장이 있던 작은방도 좋았지만, 지금 방은 딱 내가 되었다. 혼자 집을 구해 꾸몄다면 절대 살지 못했을 공간이다.

이 집에 살면서 내 인복이 정말로 타고났다는 걸 다시금 인정하게 되었다. 덕분에 서울살이가 힘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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