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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Jan 13. 2022

내 이름은 "죽음이"

죽음은 내게 가장 모순적인 단어로 기억된다. 뭔지 모르겠지만 갈망하는, 그러나 막상 앞에 닥치면 공포에 질리는. 숭고한 것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지저분한 것 그 사이의 무언가.

아무도 알려준 적은 없으나, 처음으로 9살때 유독 샤워를 할 때에만 죽음에 관해 그게 무엇일지 고민을 했다. 그것에 대해 상상하면, 온통 보랏빛인 도시를 방문한 것 같다. 보라색이 보이면 머리가 아파진다. 나갈땐 검정색 천으로 눈이 가려지는 것 같은, 순순이 이끌려가지 않으면 강제이행 될 것 같다는 생각. 형태가 없는 것을 왜 단어로 시각화 해놓은걸까. 죽음은 눈으로 보이다가도 무형의 사이 그 어딘가에서 모순적으로 다가왔다.


한 번은 다이빙을 배우는 날, 높은 곳도 아니었는데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망설이다가 뒤에 서있던 아이가 밀어서 빠진 적이 있었다. 물에 빠지면서 죽음도 어쩌면 차례가 되었을 때 가차없이 데려가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강하게 꽂혔다.

바다를 보면 뛰어들어 잠기고 싶고 세면대에 물이 있으면 고개를 쳐박고 싶어. 아니, 사실은 거짓말. 내겐 그럴 용기가 없는걸.


정신을 잃었을 때 홀로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면 간혹 운이 나쁘게도 커튼 뒤 시체를 근처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어떤 간호 조무사가 관을 끌고 들어오고 어떤 간호사는 짝을 이루어 수다를 떨며 천으로 시신을 수습한다. 그들은 그게 일상이기에 그럴 수 있다 생각했지만 몇년 전 돌아가신 우리 증조할머니 시신도 저렇게 시끄러운 웃음 속에서 수습되었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면 어딘가에서 꼭 누군가가 죽어있고, 죽어갈 것 같아.

남자친구의 조부모상 소식을 듣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보통 이럴땐 다른 사람들은 뭐라 말하지. 공감인가. 아니다, 위로를 하나. 근데 위로는 어떻게 하는거지. 슬퍼하는 중인데 괜히 뭐라 말했다가 내 의도와 달리 상처받으면 어쩌지' 따위의 생각을 해보다가 우리집에서 상을 당하면 어떨지 고민해봤다. 근데 모르겠다.

넌 할머니랑 친했어? 응, 어렸을때 자주 봐주셨거든. 아하, 그랬구나.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땐 부모님이 베이비 시터를 미처 부르지 못했을 때 간혹 외할머니랑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고 최근에도 많이 뵈었는데도 막상 돌아가시면 별 생각이 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너무 먼 미래 같아서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는 걸까. 근데 나이가 많으시긴 하신데. 모친은 간혹 조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못할 때 내게, '우리 엄마아빠 만날 날이 얼마 안남았는데...'라고 말하며 갑자기 울기도 한다. 어쨌거나 초등학생 이후로 사람과의 관계를 멀리하며 이제부터 위로를 할 일은 없으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오다 보니 공감능력은 많이 상실되어있었다.


미안, 내가 인성이 되먹질 못해서 뭐라고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위로 안해줘도 돼.


어렸을땐 모친이 죽을거라는 말을 자주 들어와서 꿈에서 그녀가 죽는 꿈을 자주 꿨다. 그럴때마다 꿈속의 나는 목소리를 잃고 어지러울 정도로 울었는데 이젠 모르겠다. 가끔 부친이 니가 사람새끼냐 묻곤 하는데 이럴때면 나도 내가 어려워진다. 어쩌다 내가 살인을 저지르면 어쩌지. 나도 내 육체적 고통에 관해선 무심한데.


공감 능력과 유대감에 관해 고민이 깊어질때마다 나는 책을 참 많이 찾아서 읽었다. 소설, 희곡, 영화 등등 인물의 대화가 많은 것들로. 그들의 대화를 보면 나도 일반인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어쩌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평범해보이기 위한 노력으로, 결과물을 보면 홀로 감쪽같이 멀쩡해보인다며 음침하게 실실 좋아하곤 했다. 이렇게 쓰고보니, 소름끼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강아지가 죽어도 슬퍼할 뿐 울까 생각해봤다. 어렸을땐 멀쩡해보이려고 남들이 울때 억지로 따라 울어볼 뿐 슬프진 않았는데.

친구들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떨것 같냐는 물음에 그들은 하나같이 "당연히 슬프겠지"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는 홀로 빈소를 지키려나,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시려나, 내가 타국이나 타지에 있으면 어쩌지 따위를 고민해왔는데. 보통 저럴땐 슬프다고 말하는게 정상이구나 애써 컴퓨터 코딩, 혹은 함숫값 마냥 외우려 시도했다. 조금 뜬금없지만, 유럽으로 여행을 갔을 땐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푸른색 죽음이 보여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내 관은 어떤 모양이지. 종소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밀려올 것 같아. 아니, 바보야. 우린 보통 화장을 하잖아.


합리화를 했다. 너무 먼 미래라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벌써 실감할 일은 아니라서 그런거다. 라고.


사람이 죽는 것이 슬픈일인가 생각해봤다. 어차피 누구나 사람은 죽어서 자연으로 흩어지는데. 어차피 거쳐야 할 일인건데.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 나는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연락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어쩌면 죽음도 같은 원리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고인과 무언가의 교류를 할 수 없어지게 되니 아쉬워서 사람이 슬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은 온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었고.

다만, 컴퓨터를 분해했다가 조립한다고 망가지는 일은 없는데 모든것이 멀쩡해보이는 시체는 왜 필요한 것들이 다 있는데도 장기가 재생되지 않고 죽어가려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사람을 살리는 뼈살이꽃 살살이꽃 혼, 숨살이꽃이 정말 있으면 좋을텐데. 나는 간혹 어떤 사람을 되살리는 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근데 신이 정말 존재하려나. 있었다면 낙태라는 의술은 없었을 것이고, 인공수정이란 의술은 도태됐을 것이다.

어떤 대화를 했던 적이 있다.

나: 미친 소리 같겠지만 간혹 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X: 글쎄 그러기엔 외소하고 귀여운데. 신이 되서 뭐하려고?

나: 아니, 장난치지 말고. 음...거창하게 의술 같은 이런 어렵고 수고스러운거 말고, 생명을 갖고 싶은 존재에게 숨을 불어넣는 일을 해보고 싶어. 어때 멋지지 않니. 위험할 것 같으면 예언도 막 해주는거야.

X: 응, 멋있네. 너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일듯. 나쁜 놈들 있으면 막 한밤중에 죽여버리고. 그건 그렇고 다리 치면 부서질 것 같은데 한 대만 쳐봐도 돼?


누가 나랑 같은 생각을 해봤을까. 누가 나랑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까.

죽음에 대해선 생각해봤자 머리만 아프고 알수도 없고 결론도 없어서 결국 의미없고 비효율적인 것들 투성이었다. 그럼에도 왜 떠오르게 되는지 모르겠다. 마치 시체와 한 방에 있다고 가정했을 때, 쳐다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서늘해서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가는 그런 것처럼. 완벽히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모순됐던 사안들에 대해 이해가 갔다. 형태가 없는 것을 단어로 만들어낸 것에 대해 관찰하려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 난 언제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해줄 수 있을까. 다음엔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는 물음에 '다음 생에는 죽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눈에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때의 사람들이 불러주게 될 내 이름은 아마도 "죽음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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