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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열 Aug 26. 2022

넌 나만 사랑해줘야 돼. 아무런 조건 없이.

혼란형 애착 유형의 발생

오래도록 고쳐지지 않는 신념 하나는, 대가나 이유 없는 사랑은 없다는 것이었다. 대개 잘못된 신념은 살아가면서 이게 아님을 깨닫고 고쳐지곤 했는데, 저것은 아니었다. 저 말은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었으니까.



tv속 많은 엄마들, 유튜브의 토크 채널에서는 모두 부모님은 자식에게 일방적이든 쌍방이든 조건 없이 사랑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게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그런 걸 들으면,

'근데 그런 게 어딨어'라는 생각부터 든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이유는 무엇이든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유가 없어 보이는 묻지 마 폭행도 유독 그날의 심리가 불안정했던 가해자의 눈에 불행하게도 피해자가 띄었기 때문일 것이고,


어린아이들이 사고 쳤을 때 '왜 그랬냐'는 교사의 질문에 '그냥'이라고 대답하는 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설명할 말빨이 없어서였다.


이런 인과관계가 어떻게든 존재하는 곳에서

흔히 떠돌아다니는, '부모님은 자식을 당연히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집 한 채가 넘는 돈을 들여서 자식을 키우는데, 아이도 예쁜 짓을 해줘야 예뻐해 줄 만하지 않나 싶었다.



최근에 강아지와 단둘이 살게 되면서 어쩌면 내가 동물들을 좋아했던 이유가, 그들이 나를 이유 없이 좋아해 줘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간식을 줘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산책시켜줘서 좋아하는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근데 모종의 이유로 산책을 못해줘도, 하루 종일 시체처럼 있느라 밥을 못줘도, 하루 종일 깨어있느라 잠을 못 자게 해도 늘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가 궁금했다.



혹은 그것은 어쩌면 강아지는 사실은 날 안 좋아하는데, 집 안에 살아있는 생물이 나 혼자라서 그럴 수도 있다.



애인을 사귈 땐 늘 첫사랑 보듯이 했고, 늘 다 주듯이 했으면서 막상 내가 왜 그들을 좋아했었는지 묻는다면 대답하지 못한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다면서 정작 나는 이유도 없이 무언가를 사랑했다.

아마 실제로 그 질문을 듣는다면, 그나마 근접한 대답은 '그들이 나를 좋아해 줘서?' 였을 거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을 못 받으면 자식은 이상해진다고 했었나. 부모덕이 없으면 남편 덕도 못 본다고 했는데. 내가 그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 견뎌온 소외감, 다른 사람들은 분명 나를 싫어할 것이라는 착각, 잊을만하면 기억나서 미칠 듯이 괴롭히는 어렸을 때의 기억들 등등 내 마음을 썩어가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들은 모두 제쳐둔 채 나는 무책임하게 평화를 찾았다.


이런 불건강한 상태에서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 물어봤다. 넌 내가 왜 좋아? 그러면 그의 대답은 항상 '그냥' 혹은 '귀여워서'.


나는 그동안 사귀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대체 날 왜 좋아했던 거지.

그들은 정말 이유가 없었을까? 

나는 그들의 마음을 의심했다. 의심해서 늘 밀어내다가도 그 따뜻함이 멀어지는 게 두려워서 다시 찾았다.

이게 한두 번이면 (그들의 착각으로) 매력이 될 수도 있지만 반복되는 상황이면 상대방은 매우 질리고 지친다.

정말 전형적인 혼란형 애착 유형을 가지고 있었다.

거짓말엔 거친 말과 '사실'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붙었고

진실에는 늘 미안하단 말과 긍정의 표현이 붙어있었다. 사실 당장 사라져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으면서 정작 사라지면 당장 죽을 것처럼 힘들어했다.

매번 나는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매일 어제오늘 각자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내가 왜 좋은데?
아 정말?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닐 텐데..

(여기서 조금 더 친해지면)

나를 사랑해줘.
아니, 사실 난 너 필요 없어 꺼져.
아니야,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미안해.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남자 친구와 사귀는 동안 나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어떤 형태의 여러 가지 사랑을 보았다.

동시에 나는 대체 몇 명의 사람들을 마음고생시켜서 떠나보냈나 고민했다.


전 남자 친구는 내가 첫사랑이라고 했다. 정말 평범한 집에서 살아오다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만나면서 그가 집에서 가져온 사랑을 내게도 나눠주었다.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부모님께 받은 것들을 내게도 필요해 보여서 물려주는 느낌이었다. 노이로제였던 내 이름이 그가 몇 번 불러줬을 땐 이게 그렇게 귀여운 이름이었나 싶었고, 그를 처음 만난 날에는 그의 집 공기가 나의 폐에도 들락거리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그의 설렘도 느껴져서 나도 지금 꿈을 꾸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근데 난 이미 늦었었다.


사랑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문제점은 사랑이 어떤 형태인지 모른다고 했는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그가 내게 주는 마음이 어떤 것 인지도 모른 채 지냈다. 그게 문제여서 헤어졌던 게 떠올랐다. 역시 사랑받고 자라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다 커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시점에 와서 부모님한테 못 받은걸 다시 받으려고 해 봤자 이미 늦어버려서 소용이 없었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때에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났는데, 그때도 그랬다. 내 입에서 '만약에'는 끊이지 않았다.

너 만약에 내가 엄청 나쁜 사람이면 어떡할 거야?
너 만약에 내가 빈털터리가 되면 어떡할 거야?
내가 갑자기 사고 나서 달걀귀신이 되어도 좋아해 줄 거야?
내가 사이코패스여도 좋아해 줄 거지?
내가 결혼하고서도 혼인신고 안 해주면?

등등.


그럴 때마다 그는 차분하게 당연하지. 그럼. 그게 무슨 문제야 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마치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은 우리가 하고 있는 사랑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것처럼.

설령 그가 내게 했던 대답들이 거짓말이어도 그 순간에는 상관이 없었다. 차라리 그런 종류는 그나마 나았다.

어차피 시작의 순간에 했던 약속은 늘 사랑의 마지막 순간에는 우스워지니까.

나도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으니까.

새삼 부끄러워서 자주 표현하진 못하지만 질려서 곁을 떠나지 않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필요했던 건 안정감이었다.  


당신도 결국엔 날 떠날 거잖아요
아무래도 난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마저도 나를 떠났잖아요
아무래도 난
괜찮아요

괜찮아요 - 장기하와 얼굴들


나: 야, 너도 결국 나 질리면 떠날 거지.

남: 어휴 안 떠난대도. 차라리 기우제를 지내라 아주.


그런데 여전히 내가 갖고 있던 치명적인 문제점은 모친과 부친이 했던 행동이 모델링 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혼 생각이 없는 내게 결혼하면 아이를 낳고 싶다는 남자 친구에게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행복할 수가 없는 구조야'라는 말만 할 뿐, '세상은 아이에게 관대하지만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고, 모성애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며, 애가 예쁜 짓을 해야 예쁠 것 같다'라고 설명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자신의 핸디캡을 알고 고칠 생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다행인 거랬는데. 나는 내 핸디캡을 알고 있어도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늪에 빠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물귀신마냥 다른 사람들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일도 살고 싶어서 홀로 사랑에 빠지는 게 취미일 정도로 이유 없이 헤프게 사랑해왔는데, 정작 받지를 못하고 내가 사랑해주는 만큼 상대방도 사랑해주길 바랐다.



여태까지 오랫동안 사귀어본 적이 없는데. 생각해보면 남자 친구는 나와 달리 꽤나 침착했고, 내가 그를 고의로 놀라게 하려고 하는 당황스러운 농담에도 그는 무덤덤했다.


이전 글에서 나를 '주변 사람들과 쉽게 닮아가고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듯,

내가 그 수많은 이상한 질문을 해오는 와중에도 나는 그와 닮아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단 담담한 척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는 연습을 했다.

자존감이 일반인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되는 만큼 예전과는 달리 그렇게 오래 만날 수 있는 것 같았다.



티비에서는 어떤 아이가 온라인 채팅에 빠져 살고 있었고 모친은 아이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집 구조 같았다.


근데 오은영 의사가 이런 말을 한다.

"근데요, 어머니... 아이가 무언가를 해야 사랑해주는구나라고 느끼게 되면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괜히 오은영 의사가 유명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좋아해 줘
아무런 조건 없이
네 엄마 아니 아빠보다 더
서울 아니면 뉴욕에서도
어제 막 찾아온 사춘기처럼
내가 아플 땐 더욱더
나근대는 목소리로 속삭여야 해
뜨거운 말로 내게 믿음을 줘
그래도 내가 싫어진다면
그건 아마 너의 잘못일 거야
날 좋아해 줘
월요일 아침에도
내 옆에만 있어줄래
오빠 날 잡아줘 날 감싸 안아줘
니 피부 속으로 날 숨겨주겠니

좋아해 줘 - 검정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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