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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다 Jan 12. 2021

하루이레 #1 눈 내린 제주에 오세요.

제주에 눈이 내린다. 많이.

1

누구나 한 번쯤은 낯선 이국땅에 자리 잡고, 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상상을 할 것이다.

내 경우에는 시간이 허락되면 삿포로에서 겨울을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특히 업무가 많거나, 일상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면 정신적 피난처로 여긴 곳이기도 하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순백의 세계. 밤이면 메밀꽃 같은 눈보라가 가로등을 스칠 것이다.

후둑후둑 점퍼의 후드를 두드리는 눈발을 가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게 나는 어느 카페에 들어선다. 빨갛게 얼어버린 양손을 번갈아가며 쥐어보고, 축축한 입김을 후후 불어넣어 꺼져가는 불꽃을 살리듯 손 끝에 온기를 전할 것이다. 감각조차 없는 귀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러 잘 붙어 있는지 확인한다.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등 언저리가 따끔한 듯 간지럽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꾹 참아야 한다. 신경을 돌리기 위해 젖은 부추를 툭툭 털어내고 '마스터, 따끈한 커피 부탁해요.'라고 말하고 늘 앉는 자리로 갈 것이다.

이따금씩 들리는 노면전차의 경적소리에 창가로 눈을 돌린다. 추위와 눈 때문에 사람들의 종종걸음이 보인다. 그들의 입 끝에 절규하는 듯한 입김이 쏟아지지만, 내 앞에 놓인 커피는 여유로운 듯 향기로운 김이 피어날 것이다. 이레에 한 번쯤은 하얀 마시멜로우가 들어간 달큼한 코코아를 먹을 것이다. 후후 불며.


그런 로망.


 2

영주십경이라는 말이 있다. 언뜻 들으면 경북 영주의 10경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영주십경瀛州十景은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10곳을 말한다. 그중 하나는 귤림추색이다. 늦가을 주황색으로 익은 귤이 주렁주렁 달린 귤밭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절경이 아닐 수 없다. 제주에 내려와 지내는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풍경도 귤밭 뷰였다. 낯선 곳에 대한 불안과 경계를 한순간 사라지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낭만적인 풍경은 주렁주렁 귤이 열린 귤밭에 눈이 내린 광경일 것이다. 녹색과 주황색, 백색이 어우러진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주로 여름철에 제주를 찾았던 내가 알 수 없었던 세계다.

낯선 풍경에 넋을 빼앗겨서, 발끝으로 한기가 스며드는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제주에서 지내길 잘했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새별오름과 성이시돌 목장 부근에 위치한 나홀로나무를 찾았다.

푸릇한 초원이 아닌 새하얀 설원에서는 어떤 자태를 보일지 궁금했다.

그야말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숨을 들이시면 기도가 얼어붙는 기분까지 부는 한파를 뚫고 나홀로나무 앞에 섰다. 광활한 초원 위에 덩그러니 서있는 이 나무를 볼 때면 세상을 등지고 제주에 온 나를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며칠째 내린 폭설과 추위에도 나홀로 나무를 찾는 사람들은 많았고,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차로 돌아가는 사이 금세 눈보라가 흩날렸고, 세상이 뿌옇게 변했다.

돌아오는 길에 오설록에 들러 영귤차 3봉을 구입했다.

집 근처 주요 길목마다, 라이언 눈사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구나, 싶었다.


3

1주일 넘게 눈이 내리고 있다. 삿.뽀.로에 대한 어떤 기대감은 여지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환기 차 창을 열면 깨진 소스병이 손끝에 상처를 내는 듯 아린 바람이 불어왔다.

장을 보러 간다는 것을 미뤘더니 냉장고는 비어 가고, 연명을 위해 결단을 하고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을 가기로 결심했다. 잠깐 눈이 그친 사이에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도로의 좌와 우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도로와 인도가 하나가 되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비포장도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설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도로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미끄러움 때문에 서행을 하는 자동차들은 비상등을 켜고 줄지어 가고 있었다.

문득 내 인생도 폭설이 내려 길을 잃고 미끄러져 이곳까지 왔고, 나는 지금 비상등을 켜고 길을 더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어떤 큰 잘못을 한 남자가 세상에 등 떠밀려 강원도 깊은 산을 방황하고 무릎까지 푹- 푹- 잠기는 눈길을 걷는 장면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며 발을 뺄 때마다, 죄받는 기분이 들었고, 어떤 기억들이 덩달아 쏟아져 나왔다. 자칫하면 경계석을 밟아 눈밭에서 뒹굴거나 구급차를 부르는 촌극을 연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거음은 조심스러웠다.


따뜻한 편의점에서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새로 나온 과자와 라면을 구입하고 나오니, 어느새 블리자드가 몰아치고 있었다. 금방 좋았던 날씨가 5분도 지나지 않아 눈보라가 몰아치는 이형적인 세계. 죄는 아까 받았으니, 이번에는 벌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온 몸이 눈에 덮인 형국이다. 바람이 눈을 싣고 창을 두드린다. 모래를 뿌리는 듯 창가에 사그락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4

채플린 형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설원을 달리며 연인에게 소리치던 아름다운 광경은 겉과 속 모두 뭉그러지는 슬픔과 고통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형에게 며칠 째 집에 묶여 있다는 말을 했지만,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 모양이다. 내려봐야 얼마나 내리겠어.


창문 앞 텃밭에 월동채소로 배추와 무를 심은 노부부가 며칠 째 모습이 보이지 않아 걱정스럽다.  

그들이 겨우내 먹을 요량으로 정성 들인 배추와 무가 못쓰게 되는 것은 아닐지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집의 지붕에 쌓인 눈은 난방 덕에 녹아내리기도 하는데, 노부부의 허름한 돌집에 내려앉은 눈은 착착 쌓이기만 한다. 추운 것은 아닌지,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1층과 2층을 오가며 틈틈이 지켜본다. 그러다 돌집 작은 창문에 따뜻해 보이는 오렌지빛 백열등이 켜지면 안심이 된다.


5

형에게 연락이 왔다, 서울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차를 두고 가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다. (내일 서울에 가는데...)


엄살을 부렸지만, 그래도 눈 내린 제주가 좋다.

제주에 눈이 많이 내렸다. 많이.

어쩐지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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