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늦은 밤 해안선을 수놓는 오징어배를 보며 감상에 젖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정서적 환기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됐다. 그래서 모처럼 육지로 넘어가 한적하게 지낼 계획을 세웠다.
가급적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시간을 고려해서 항공권을 예약했다. 출발 당일 조금 이른 시간, 미리 간단하게 꾸려둔 짐을 가지고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눈이 제법 내려서 가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긴 했지만, 큰 문제없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주 국제공항에 오면 마음이 설렌다
언제나처럼 검색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짐을 올려두고, 간단한 수색을 마친 몸이 먼저 검색대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좀처럼 내 캐리어가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제주를 오가면서도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검색대 기기의 문제인 듯 보이기도 했지만, 내가 소지한 어떤 물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물건도 없었다.
그런데도 검사 시간이 길어졌다. 캐리어는 검색대의 탐지기 영역을 벗어날 듯하다가 반추하듯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반복했다. 내 뒤에 줄 섰던 승객들이 나 때문에 대기하는 모습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검사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기열의 사람들은 원망하는 눈빛으로 나와 내 짐과 검색대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점점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는 회초리가 되어서 내 마음을 채찍질했다. 이른바 '항시적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캐리어를 뱉었다 삼키기를 반복하던 괴물 컨베이어 벨트는 결국, 다른 라인으로 내 가방을 뱉어냈다. 공항직원은 내게 항공권을 보여달라고 했고, 이어 캐리어를 열어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내 가방이 다른 라인으로 빠져나오자, 그동안 대기하던 사람들의 짐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저마다의 탑승구로 향했다.
캐리어의 지퍼를 열면서 "어떤 물건 때문에 그런가요?"라고 묻자, 공항 직원은 짐짓 평온한 표정과 친절한 말투로 "총알이 있어서요."라고 말했다. 아 그렇구나. 내 가방에 총알이 있었구나.
"네?"
세상에 총알이라니!
의사양반 아니... 공항양반 총알이라니, 내가 총알이라니?
취미 삼아 클레이 사격은 몇 해인가 했어도, 총탄을 소유한 적은 없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BB탄 총알은 사용한 적도 없었고, 아니 애초에 BB탄 총알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내가 공항 검색대에 도달하기 전 캐리어를 밖에 두고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누군가가 총알을 넣은 것이 아니라면, 내 가방에서 총알이 나올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정말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무장한 공항 경찰대가 출동하고 날 끌어내고, '이 총알은 제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라고 항변한다. 공항직원들은 내 캐리어를 전부 샅샅이 뒤진다. 그 사이 사람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며, '어머, 웬일이야!', '총알을 소지했데!' '테러리스트야?' '미친 거 아냐?'라는 소리가 연신 들려온다.
순간 망상과 대응 방법을 모색하면서, 공항직원의 요구에 따라 가방을 열고, 펜과 노트가 보관된 파우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고 공항직원이 총알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어? 아! 싶었다. 터치펜 겸용으로 제작되어 예전에 사용했던 볼펜의 뚜껑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실리콘 재질의 끝부분이 마치 총알처럼 보인 것이다. 검색대 담당 직원의 상상력에 감탄을 했고, 한편으로는 정말 열심히 일하는구나 싶었다. 공항직원은 협조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고, 나도 진심을 다해 "고생 많으시네요!"라고 이야기하고 탑승구로 향했다.
그리고 육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 터치펜을 깊고 깊은 서랍 안에 봉인했다.
그동안 숱하게 가지고 다녔던 것인데, 왜 이번에 문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처럼... 다만 이번에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아무튼 총알을 가지고 비행기에 타면 안 된다. 총알을 닮은 볼펜 뚜껑이 검색대에서 문제가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