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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 Jul 14. 2023

온전한 우리

"너무 폭력적인 아버지도 문제지만 너무 다정한 아버지도 문제야. 다정한 아버지 밑에서 큰 딸들은 순진하게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아버지 같다고 생각한다니까?"


"왜 로스쿨을 미국으로 가요?"

저는 어리석게도 이런 질문에 취약하다. 미국 로스쿨에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도 잘만 썼던 질문이지만 정작 현실에서 누군가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할지 난처하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이 물어본다면 건성으로 대답해도 상관없지만 애매하게 친한 사람이 던지는 질문에는 무방비하다. "사실은 제가~"로 시작해도 되는 것일까?


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시작은 전혀 해피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불행한 일로부터 내 꿈이 시작되었다. 해외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나는 이 일을 볼드모트라고 부른다. 해리포터를 좋아해서라기보다 일상생활에서 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당한 일을 알지만 굳이 입 밖으로 성폭행이라고 내길 나도, 그들도 꺼려한다는 점에서 볼드모트 같기에. 그리고 성폭행하면 딱딱하고 무겁기 그지없어 침묵행 하이패스 티켓이 되어버리지만 볼드모트라고 하면 적당히 무겁고 정당히 위트 있기에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


볼드모트를 겪고 3년 간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의 연속이었다. 이전까지 트라우마란 나의 머릿속에 대충 떠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건이 심리적 신체적으로 남아 사건이 끝난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고통받는 상태 혹은 질환. 트라우마를 겪었다는 후기를 들으면, '아,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왜 이미 끝난 일에 집착하는 거지?'라는 아니꼬운 질문이 함께 있었다. 어린 나에게 트라우마란 극복 하면 그만인 일이었던 것이다. 정작 내가 당사자가 되었을 때, 그리고 정신과 진료기록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읽었을 때 무력함에 많은 눈물로 날을 지새웠다. 눈을 감으면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성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밤이 오지 않기를 바랐고 아침에는 또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트라우마를 가벼이 여긴 벌처럼 처절하게 트라우마를 마음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경찰조사를 받고 지친 나에게 통역해 주시던 분이 물어봤다.

"What is your dream?"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창 밖으로 노을 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I will go to law school in the US"라고 말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대뇌를 거치지 않고 마음에서 뱉은 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경찰조사를 받고 검사와 인터뷰하고 재판에 서고 변호사랑 싸우는 일련의 일은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보다 날 힘들게 했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인터폴 무슨 조약으로 한국과 터키에서 공조수사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에서 받은 조사자료를 인터폴로 넘겼으나 정작 터키에 갔을 때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참담했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었다면 희망이라도 주지 말지.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견뎌내면서 인터폴이나 국제형사재판소가 눈에 들어왔고 이런 곳에서 일하려면 한국보다 미국에 더 기회가 많을 것 같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애매하게 친한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볼드모트 이후 3년이 지나 사귄 사람들에게 굳이 이런 긴 서사를 늘어놓아도 되는 것일까?


매일매일 시작되는 하루를 저주하면서도 하루를 견뎌내려고 애썼다. 친한 언니 A는 차를 마시다가 어떤 대화 끝에 "너무 폭력적인 아버지도 문제지만 너무 다정한 아버지도 문제야. 다정한 아버지 밑에서 큰 딸들은 순진하게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아버지 같다고 생각한다니까?"라고 말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버지에게 받은 다정함이 내 불행의 원인이라고?


나는 A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아예 틀린 말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아버지에게 쌀 한 톨만큼의 책임도 지우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러려면 A의 말을 대차게 걷어차야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볼드모트에 관한 귀책사유에 우리 부모님의 이름은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됐다. 그날 대화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A의 말은 여전히 내 기억 한구석에 자리 잡아 가끔 해명을 요구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남자들이 보내온 다정함에서 자랐다. 따뜻하고 젠틀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닮은 남동생, 조카를 아껴주시던 고모부, 단 둘이 미술관을 가도 이상할 게 없는 사촌동생, 학교에서 타온 상장을 모두 가보로 여기시던 할아버지. 고모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집에서 자라온 나로선 A의 말을 듣기 전까지 가족 울타리 안에서 받은 남자사람의 사랑을 인지하지 못했다. 할머니와 고모들, 그리고 어머니가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말 그대로 가녀장제 가족에서 자랐으니까. 조용하고 다정하며 수줍은 남자가족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던 시기, 대학가에서는 미투가 유행처럼 번졌다. '나는 (남자들로부터) 이런 차별과 폭력도 당했다!'라고 고백하던 분위기에서 나는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다른 학우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그나마 당했다고 말하는 이야기는 매우 사소하기 그지없었다. 이러니 '네가 순진하게 세상 남자들이 다 다정할 거라고 착각하는 거야'라는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나자빠질 수밖에.


여전히 나는 A의 말에 완전히 부정도, 긍정도 못하고 있다. 그대로 미결사건처럼 기억 저 뒤로 처박아두려고 한다.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다정함에 취해 세상을 순진하게 봤다는 비난이 사실이라면 아버지의 다정함으로 힘든 시간을 견딘 것도 사실이니까. 볼드모트를 직면할 수 있었던 용기도 날 키운 다정함에서 성장한 것이니까.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완벽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온전한 우리를 경험하길 바란다. 온전한 우리는 다정해지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정함에 취하지는 않되, 다정함이 지닌 힘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다정함은 나에게 "왜 미국으로 로스쿨을 가요?"라는 답변을 주지 않지만 "어떻게 미국로스쿨을 가게 되었어요?"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있게 한다.


그동안 받은 다정함이 저를 견디게 했어요. 그러니 저는 온전한 우리가 되길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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