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는 워킹맘이 없다>
프랑스에는 워킹맘이 없다. 활동적인 엄마가 있을 뿐!
최근에 둘째의 1개월 검진일이 있어서 동네에 있는 의사를 보러 갔다. 의사는 이것저것 질문을 하다가, 나에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언제 다시 복직해요?" "9월에 할 예정이에요."라고 대답을 한 이후 나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직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파리 외곽-으로 이사 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아직 내 주치의는 전에 살던 파리 시내에 있다. (프랑스는 주치의를 필수적으로 지정해서 환자의 의료기록을 체계적으로 보관하는 동시에 건강보험과 연계해 환급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준다.) 프랑스에는 현재 의료 인력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아직도 주치의 변경을 못했다. 각설하고, 내가 파리에 도착하고부터 쭉 나를 봐온 내 주치의는 내가 일하는 중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다. 주치의니까. 하지만 내가 만난 이 의사는 내가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전업주부인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일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그렇게 물어본 것이다.
프랑스에서 '워킹맘'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일하는 엄마’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대신 '마멍 악티브 (Maman active)'라는 표현을 쓰는데, 직역하면 '활동적인 엄마'라는 뜻이다. 꽤 긍정적인 어감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내가 부정적인 사람이라 비꼬아 보는 것 같지만, 그냥 다르게 생각해 본다고 하자.) 그렇다면 일을 하지 않는 엄마는 '비활동적인 엄마'란 말인가?
이 단어의 어감에서도 볼 수 있듯, 프랑스에서는 여성이, 그리고 엄마가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아이가 만 3살이 될 때까지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소위 '3세 신화'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3살이 아니라 3개월 만에 복직하는 엄마들을 훨씬 더 많이 봤다. 아이를 한 달 전에 낳은 내가 8개월 뒤에 복직한다고 하니, 의사가 "충분히 오래 쉬네요"라고 대답한 걸 보면 이곳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러한 인식이 조금 불편하다. 내가 한국에서 '어린애를 두고 일하러 나가는 인정머리 없는 엄마'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전업주부인 엄마들이 '일 안 하는 엄마'로 낙인찍히는 것 역시 마음이 좋진 않다. 이는 사회적 시선과 압박, 시부모나 친정 부모의 강요가 아닌,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맡겨야 할 문제다. 내가 아는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게 맞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중적 인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나는 나의 선택으로 '활동적인 엄마'가 되었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계속 그럴듯하다. 이런 나도 한 때는 '활동적인 여자(?)'였다. 그 모든 시작은 2013년이었다. 한 해 동안 교환학생과 어학연수생 신분으로 프랑스에서 지낸 후, 한국에 돌아와 한 학기 동안 프랑스 대학 편입 절차를 밟았고, 2014년 9월부터 본격적인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
부모님께서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시긴 했지만, 남들 다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쯤 다시 맨땅에 헤딩하듯 온 프랑스 유학인지라, 홀로 '후퇴'해 다시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이 결정을 믿고 지원해 주신 부모님께 그저 감사할 뿐이다), 아버지가 퇴직하신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더 요구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최대한 아껴 살았다.
모든 물가가 비싼 파리에서 가장 먼저 줄여야 할 지출은 월세였다. 그래서 나는 화장실 문도 없던 3평짜리 하녀방을 선택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나오는 하녀방은 실제 하녀방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만이다.) 그마저도 월세가 550유로. 당시 환율이 1유로에 1,500원이 넘었으니, 한 달에 약 83만 원을 내야 했다.
프랑스는 외국인도 학생이면 약간의 CAF(주거 보조금)를 받을 수 있지만, 한국에서부터 급하게 집을 구하는 바람에 현지에 있던 프랑스인 남자친구 명의로 계약했다. 덕분에 나는 보조금 한 푼 없이 '쌩으로' 83만 원을 매달 납부해야 했다.(사실 내가 고른 집의 월세 자체가 저렴하기에 보조금을 받더라도 얼마 되지는 않았다는 게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픈 부분이다.)
그 시절에는 유학생 비자 갱신을 위해 매달 615유로의 재정능력을 증명해야 했지만, 나는 700유로를 한 달 예산으로 정하고 그 안에서 버텼다. 초반에는 파이팅 넘치는 젊음덕인가 그럭저럭 할만했지만, 생활이 쪼들리는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그러던 중, 어머니와 통화하다가 '너희 아빠 퇴직해서 고민이 많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더 아끼며 살았다. 그런데 나중에야 아버지가 '애 걱정하게 왜 쓸데없이 그런 소리를 했냐'며 어머니께 한 소리 했다는 걸 알았다.
숨통이 트인 후에야 솔직하게 이렇게 살았노라 말씀드렸는데, '돈 더 달라고 하지, 왜 미련하게 그렇게 살았냐'며 꾸중을 들었다. 자식이 그렇게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으리라. 아직도 괜히 얘기했나 싶다.
파리에 살던 시절 이야기는 아니지만, '쪼들리는 생활' 하면 아직도 생생한 일화 하나가 떠오른다.
지방 소도시에 살던 교환학생 시절, 가끔 파리에서 라면을 공수해 오면 (그 시절 지방에서는 한국 라면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라면 하나로 반 부셔서 끓여 먹고, 그 국물에 밥 말아먹고, 나머지 반 끓여 먹고, 그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형식으로 네 끼를 먹고는 했다. 얼마 전, 밥 먹으면서 넷플릭스에서 « 냉장고를 부탁해 » 를 봤는데, 이희준 배우가 라면으로 두 끼를 먹으면서 무명시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며, 나만 그렇게 산 것은 아니구나 하고 잠깐 회상에 젖었었다. 물론 이희준 배우는 남자인지라 라면 반 개는 턱없이 부족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언니한테서 연락이 왔다. 요지는 파리에 입점한 한국 대형 프랜차이즈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지 않겠냐는 것.
가난한 학생에게 아르바이트라니! 이는 나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았다. 그 시절 나는 진로를 또 (!) 바꿔서 학사 마지막 학년을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고, 졸업조건을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신경을 쓸 것이 많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그저 면접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의 첫 프랑스 직장은 그곳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나는 '활동적인 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