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920g이 내게 가르쳐준 것
프랑스에 와서 처음 휴대폰 고지서를 열어봤을 때, 익숙한 숫자들 사이에서 낯선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Mon empreinte carbone est de 920g CO2e.
내 탄소발자국은 920g CO2e입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요금 20.18유로, 데이터 8기가, 통화 20분—여기까지는 한국 고지서와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그 아래, 초록색 잎사귀 아이콘과 함께 적힌 탄소 배출량. 내가 이번 달 휴대폰을 쓰면서 지구에 남긴 흔적의 무게.
한국에서 10년 넘게 휴대폰을 썼지만, 내 통화가 몇 그램의 탄소를 만들어내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Free 모바일 앱에 들어가보니 더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탄소발자국은 전 생애 주기 분석(LCA)을 기반으로 계산된다고. 네트워크 1GB당 탄소 발자국에 내가 사용한 데이터량을 곱하고, 월별 네트워크 유지에 드는 고정 탄소를 더한다고. 공식까지 친절하게 적혀 있다.
Ax + b.
A는 네트워크에서 GB 1개의 탄소 발자국, x는 이번 달 사용한 GB 용량, b는 가입자당 월별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탄소 발자국.
통신사가 왜 이런 걸 알려줄까?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프랑스 법률에 따르면,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와 통신 사업자는 가입자에게 네트워크 접속 제공에 소모되는 데이터 양과 그에 상응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알려야 한다.
처음 며칠은 그냥 신기했다. 한 달 뒤, 두 번째 고지서가 왔을 때는 슬쩍 비교하게 됐다. 지난달보다 줄었나? 이번 달은 데이터를 덜 썼으니까 탄소도 줄었겠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 탄소 배출량을 신경 쓰고 있잖아.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탄소를 줄이면 요금이 깎이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숫자가 보일 뿐인데, 그 숫자가 행동을 바꾼다. 마치 음식 포장지에 적힌 칼로리처럼. 500kcal라고 적혀 있으면 괜히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듯이, 920g CO2e라고 적혀 있으면 괜히 와이파이를 더 찾게 된다.
Free의 웹사이트에는 회사의 환경 약속도 적혀 있다. 밤에는 사용하지 않는 주파수 대역을 끈다고. "La nuit, dormez sur vos deux oreilles"—밤에는 푹 주무세요, 그동안 우리는 안 쓰는 주파수를 끄고 있을게요. 2021년부터는 직접 전력 소비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한다고. 서랍 속 헌 휴대폰? Free 매장의 수거함에 넣으면 된다고.
이게 진짜 효과가 있는지, 그린워싱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한국에서는 어떤 통신사도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숫자는 고지서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카르푸에서 요거트를 고르다가 포장지에서 또 다른 등급을 발견했다. Nutri-Score는 알고 있었다. 영양 등급, A부터 E까지. 초록색 A면 건강에 좋고, 빨간색 E면 조심하라는 뜻. 그런데 그 옆에 비슷하게 생긴 또 다른 라벨이 있었다.
Eco-Score.
A등급 요거트와 C등급 요거트. 맛은 비슷해 보이는데, 하나는 환경에 덜 해롭고 하나는 더 해롭다. 원료 생산부터 운송, 포장, 폐기까지—제품의 전 생애주기에서 발생하는 환경 영향을 계산해서 등급을 매긴다.
브라질에서 온 소고기보다 프랑스 방목 소고기가 점수가 높다. 겨울에 온실에서 재배한 토마토보다 과들루프에서 배로 실려온 바나나가 점수가 높을 수도 있다. 단순히 '로컬이 좋다'가 아니라, 실제 탄소 배출량을 계산한 결과다.
2021년부터 Carrefour, La Fourche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자발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앱으로 바코드만 찍으면 거의 모든 식품의 에코스코어를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엔 귀찮았다. 요거트 하나 사는데 뭘 이렇게까지. 그런데 몇 주 지나니까 손이 먼저 A등급으로 간다. 가격이 같으면 당연히 A를 고르게 된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
슈퍼마켓에서 계산을 마치면 항상 마트 직원이 묻는다.
"Ticket?"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서 "Oui"라고 했다. 영수증이 출력됐다. 몇 번 더 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요청하지 않으면 안 준다는 뜻이었구나.
2023년 8월부터 프랑스에서는 영수증 자동 출력이 금지됐다. 매장, 카페, 모든 상점에서. 원하는 사람만 요청하면 종이로 받거나, 이메일이나 SMS로 전자영수증을 받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300억 장의 영수증이 인쇄됐다고 한다. 250만 그루의 나무, 9억 5천만 리터의 물. 게다가 영수증 용지에는 비스페놀A 같은 유해물질이 들어 있어서 재활용도 안 된다. 그냥 쓰레기.
이제 계산대마다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다. "법에 따라 영수증은 요청 시에만 출력됩니다."
실제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영수증을 요청한다고 한다. 어떤 조사에서는 60% 가까운 고객이 여전히 종이 영수증을 원한다고. 특히 나이 든 세대일수록 그렇다. 하지만 묻지 않으면 안 주는 것—이 작은 디폴트의 변화가 행동을 바꾼다. 나도 어느새 "Non, merci"라고 답하게 됐다. 은행 앱에 결제 내역이 다 뜨는데, 굳이 종이가 필요한가?
한국에서는 편의점에서 껌 하나 사도 영수증이 나온다.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그 종이들의 무게를 우리는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맥도날드였다.
15구 집 앞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시켰다. 트레이가 나왔는데, 감자튀김이 종이 봉투가 아니라 접시에 담겨 있었다. 리유저블 플라스틱 접시. 음료도 일회용 컵이 아니라 씻어서 다시 쓰는 컵에.
20석 이상 매장에서 매장 식사를 할 경우, 일회용 용기 사용이 금지된 것이다. 2023년 1월부터. 프랑스 패스트푸드 업계는 연간 18만 톤의 포장 쓰레기를 만들어왔는데, 이 법 하나로 그걸 확 줄인 거다.
직원이 안내한다. "접시는 쓰레기통에 버리지 마세요." 별도의 반납대가 있다. 손님들이 먹고 난 접시와 컵을 거기 놓으면, 직원이 수거해서 세척한다. 맥도날드가 설거지를 한다. 세상이 정말 바뀌었구나.
물론 불만도 있다. 손님들이 리유저블 컵을 들고 나가버린다거나, 접시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거나. 가게 입장에서는 설거지 인력도 추가로 필요하다. 하지만 법은 법이다. 적응하는 수밖에.
버거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한국 맥도날드에서 이런 법이 시행되면 어떨까. 아마 난리가 날 것이다. "불편하다", "비위생적이다", "자유를 침해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냥 된다. 법이 바뀌면 사람들이 따라온다.
마트 과일 코너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있었다.
사과, 배, 당근, 감자, 토마토—약 30종의 과일과 채소가 비닐 포장 없이 진열돼 있다. 2022년부터 시행된 법이다. 1.5kg 미만의 과일과 채소는 플라스틱 포장이 금지됐다. 2026년까지 거의 모든 신선식품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과일에 붙는 작은 스티커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플라스틱 스티커였는데, 이제는 퇴비화 가능한 종이 재질이다.
처음엔 불편했다. 낱개로 된 사과를 어떻게 들고 가지? 그런데 마트에서 종이 봉투를 비치해뒀다. 아니면 장바구니에 그냥 담으면 된다. 어차피 집에 가서 씻을 거니까.
한국 마트를 떠올려봤다. 사과 세 개가 스티로폼 트레이에 놓이고, 랩으로 감싸져 있다. 바나나 한 송이도 비닐에 들어 있다. 이미 껍질이 있는 과일인데, 왜 또 포장이 필요한 걸까. 우리는 너무 오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만든 법이 하나 더 있다.
2016년부터 400㎡ 이상 슈퍼마켓은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을 버릴 수 없다. 반드시 푸드뱅크나 자선단체에 기부해야 한다. 버리면 벌금이다.
이 법을 만든 국회의원 기욤 가로(Guillaume Garot)는 이렇게 말했다. "TV에서 봤어요. 대형 마트들이 멀쩡한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을. 그 음식이 파괴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어요. 이 스캔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그게 시작이었습니다."
법 시행 이후 푸드뱅크 기부량이 20~30% 증가했다. 신선식품, 유제품, 빵—예전에는 쓰레기가 됐을 음식들이 이제는 누군가의 저녁이 된다. 매일 아침 2,700개 이상의 슈퍼마켓에서 전국 80개 창고로 식품이 운송된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다. 슈퍼마켓은 전체 음식 쓰레기의 14%만 차지한다. 농업이 32%, 식품 가공이 21%, 소비자가 19%. 법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이 훨씬 크다. 하지만 시작은 시작이다. 적어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버리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됐다.
프랑스에서 1년을 살며 깨달은 건, 이 나라가 환경을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시스템의 설계"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환경 보호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에 맡겨진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프랑스는 다르다. 영수증을 안 주는 게 기본이 되면, 개인이 "영수증 필요 없어요"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회용기를 안 주면, 개인이 텀블러를 가져갈 필요가 없다. 마트에서 비닐 포장이 없으면, 개인이 에코백을 챙길 필요가 없다.
불편함을 개인에게 떠넘기지 않고, 기업과 시스템이 먼저 바뀌도록 법으로 강제한다.
물론 반발도 있다. "자유를 침해한다", "기업 부담이 커진다", "현실적이지 않다". 하지만 법이 시행되고 나면, 놀랍게도 사람들은 적응한다. 처음엔 불편해하다가, 몇 달 지나면 그게 당연해진다. 그리고 예전 방식이 오히려 이상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내 휴대폰 고지서를 본다.
920g CO2e.
킬로그램도 안 되는 숫자. 솔직히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비행기 한 번 타면 몇백 킬로그램이 나오는데, 고작 920그램.
하지만 이 숫자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거트를 고를 때 에코스코어를 확인하게 됐다. 영수증을 굳이 안 받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맥도날드에서 접시에 담긴 감자튀김이 이상하지 않게 됐다. 비닐에 싸이지 않은 사과가 자연스러워졌다.
프랑스가 완벽한 나라라는 말이 아니다. 이 나라도 문제가 많다. 하지만 적어도 이 나라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쓰는 것들의 무게가 얼마인지,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는 이 질문을 잊지 않으려 한다. 고지서에 탄소 배출량이 적혀 있지 않아도, 영수증이 자동으로 나와도, 일회용기에 음식이 담겨 나와도—그 뒤에 숨겨진 숫자들을 기억하려 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니까.
프랑스는 그걸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Free 모바일 앱을 열 때마다 초록색 잎사귀 아이콘이 보인다. 920g. 지난달보다 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1년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