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 남자. 큐레이터 3 <시즌1>

시트콤: 이 완벽한 계획의 유일한 오점은…!

by 새벽별노리


이언의 사무실

펼쳐진 노트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국제 교류를 돕는 프로그램으로 다음에 대한 연수 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는 다음 달에 있을 파리 행을 떠올렸다. 소수의 실력 있는 큐레이터들만이 선발되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숨겨진 수장고를 들여다 보고, 퐁피두 센터의 전문가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큐레이터라면 누구나 꿈꾸는 기회였다.



이 완벽한 계획의 유일한 오점은…


한적한 사무실 안, 차분한 햇살이 창가를 비추고 있었다. 큐레이터인 이언은 노트북 화면을 꼼꼼히 확인하며 다음 전시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시트콤 작가 담미가 앉아 있었다. 담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왜 남주는 사랑 고백을 할 때 꼭 빗속에서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이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정확했다.


이언

"작가님."


담미

"네, 큐레이터님."


이언

"제가 이번에… 국제 큐레이터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최종 선발됐습니다."


담미는 펜을 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담미

"와, 대박! 역시 큐레이터님! 평소에 그렇게 완벽하시더니. 그래서… 저랑 작업하는 건 잠시 쉬시고 혼자 떠나시는 거네요?"


그녀의 말에 이언은 미세하게 망설였다. 그의 완벽한 계획에 유일하게 없었던 변수가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는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담미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언

"잠깐,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담미가 입을 다물자, 이언은 서류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이건 제 항공권입니다. 그리고… 이건 작가님 항공권입니다."


담미는 봉투를 받아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담미

"제… 저요? 제가 왜…?"


이언

"이번 연수 프로그램이 '미술의 대중화'를 주제로 하는 터라, 작가님의 관찰력과… 대중적인 시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언은 아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제시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빨랐고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담미는 항공권을 내려다보았다. 봉투 안에는 파리행 항공권이 두 장 들어 있었다. 하나는 그의 이름, 다른 하나는 그녀의 이름.



담미

"큐레이터님…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저는 작품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작가인데요. 저 데려가서… 인간 도록으로 쓰실 겁니까?"


담미는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이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언

"제 완벽한 연수 일정에, 작가님의 유머가… 유일한 오점인 것 같아서요."


담미는 그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완벽주의자 큐레이터가 처음으로 자신의 완벽한 세계에 오점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고백.



담미

"이건… 정말이지… 제 시트콤에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완벽하네요. 큐레이터님. 파리에서 뵙죠."


담미가 장난스럽게 답하자, 이언의 얼굴에 긴장이 풀린 미소가 번졌다.


이언

“파리일정 차질이 없으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


(스케줄을 확인하고..)

담미

“네, 가능합니다. 그럼요~ 저희는 그날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죠. ”





인천공항

이언은 파리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수화물을 부치고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정돈된 계획표를 확인했다. 오늘 밤 파리 도착, 내일 오전 공식 회의, 오후부터는 전시 사전 답사. 모든 것이 빈틈없이 짜여 있었다.

그때, 그의 옆으로 담미가 캐리어를 끌며 다가왔다. 어제 만난 우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편안한 차람에 모자를 눌러쓴 차림이었다. 루카스는 미소 지으려는 자신을 억눌렀다.


이언

“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시트콤 소품이라도 챙겨 오셨나."


담미

“파리는 미식의 도시잖아요. 먹고 마시고 기록하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커다란 캐리어를 수화물 벨트 위로 올렸다. 캐리어가 덜컹거리며 넘어가자, 한쪽 바퀴가 삐거덕거렸다. 이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완벽주의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소음이었다.


그들의 파리행 비행기는, 그렇게 완벽하게 이륙했다.


샤를 드 골 공항

밤늦게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짐을 풀고

숙소에서 인사를 한다.


루카스는 회의와 답사 일정을 빈틈없이 소화했다. 회의장에서는 냉철한 큐레이터였고, 갤러리에서는 예리한 전문가였다. 반면, 담미는 진지하게 메모를 하면서도 가끔씩 엉뚱한 질문을 던져 분위기를 환기시키곤 했다.




프랑스, 파리

완벽한 계획과 완벽한 사고뭉치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이언은 완벽하게 준비된 큐레이터의 모습으로 담미를 기다렸다. 담미는 캐리어에서 튀어나온 옷가지들을 뚫고 마침내 찾아낸 핑크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들은 파리 도심 한가운데 있는 그랑 팔레(Grand Palais)로 향했다. 그랑 팔레는 현재 보수 공사 중이므로, 임시 전시장인 그랑 팔레 에페메르(Grand Palais Éphémère)에서 'Paris+ par Art Basel' 아트페어가 열리고 있었다.


Paris+ par Art Basel

거대한 유리 돔 아래, 세계 각국의 갤러리가 엄선한 현대미술 작품들이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언은 그룹에 합류해 큐레이터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그는 갤러리스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작품의 배경에 대해 미학적으로 분석하는 완벽한 큐레이터의 모습을 보였다.

그때, 담미는 혼자서 전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거대한 조각 앞에서 기괴한 포즈를 취하며 셀카를 찍거나, ’이 작품은 시트콤에 나오면 1화 만에 종영’이라며 혼잣말을 했다.


한 번은 오디오 가이드에서 나온 ‘자유로운 정신의 해방‘이라는 표현을 듣고는 "어머! 저건 딱 나잖아? 나도 파리에서 자유로운 정신을 해방할 거야!"라고 외치다가 이언에게 끌려 나오기도 했다.


오후의 여유, 그리고 식사

점심을 먹은 후, 이언은 완벽한 계획에 따라 오후 시간을 비워두었다. 그들의 숙소 근처에 있는 방돔 광장(Place Vendôme)으로 향했다. 광장 중앙에는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녹인 대포로 만들었다는 거대한 원기둥이 우뚝 서 있었다.

담미가 원기둥을 보며 말했다.


담미

“와, 선생님. 저거 보세요. 저거 다 녹인 대포래요! 대포로 만든 기둥이라니, 완전 시트콤 소품 아닌가?”


이언은 담미의 말을 듣고 웃음을 참았다.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난 뒤, 이언은 그녀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이언은 파리의 오래된 카페에서 담미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 10분 전, 그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때, 창밖으로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에 그는 멈칫했다.


담미는 벤치에 앉아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진지하게 몰두하는 모습은 어제의 그 작가와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펜을 멈추더니, 휴대폰을 들고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리처럼 내밀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혀를 내미는 등 연이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완벽하게 정돈된 이언의 세계에서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때, 그녀가 마지막으로 눈을 한껏 감고 코를 찡긋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빵'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담미가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 그를 발견한 그녀는 얼굴이 빨개지며 휴대폰을 급히 내렸다.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내 카페 안으로 들어왔고,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담미

“이건… 그냥, 캐릭터 연구 때문에…."

이언은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웃음에 담미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카페에 울려 퍼졌다.


이언

“자,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요? 파리의 진정한 맛을 보여줄게요."


이언은 처음으로 계획에 없던 충동적인 말을 건넸다.

그의 완벽한 계획표는 이미 그녀의 웃음처럼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는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꼈다.(방금 전 카페에서 웃음을 터뜨렸던 이언과 담미는 레스토랑에서 재회를 한다.)





호텔 로비

이언은 로비에서 기다리며 담미를 올려다봤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가,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담미

“옷을… 좀 차려입어야 할 것 같아서요."


담미는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이언은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평소에 가장 좋아하는 화가, 클로드 모네의 그림 속 여인처럼 서 있었다. 핑크빛이 감도는 흰색의 원피스는 마치 그녀를 위해 재단된 듯 완벽했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청초하면서도 우아했다. 이언은 그녀의 모습에서 청순함, 섹시함, 우아함이 한데 어우러져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완벽주의적 미적 기준을 단숨에 뛰어넘는 모습이었다.


어, 놀라셨나 봐요?"

담미는 그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명색이 시트콤 작가인데, 콘셉트에 맞춰 상황을 즐겨야죠."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언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평생을 한 가지 콘셉트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는데, 그녀는 매 순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 다채로운 모습이 마치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혹시… 저한테 반하셨어요?"


담미의 농담에 이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이언

“아름답네요."


짧고 단호한 한마디였다.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설렘과 긴장, 그리고 진심이 뒤섞인 듯했다. 이언은 그녀가 당황해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담미는 픽 웃으며, 그의 말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썩소를 날렸다.



담미

“그럼, 가시죠."


그녀의 도발적인 웃음에 이언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 여자는 한순간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의 완벽한 세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온은 그 균열이 싫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근사한 레스토랑인 “므씨으 블루(Monsieur Bleu)”를 예약했다. 이 레스토랑은 팔레 드 도쿄에 있는데, 센 강과 에펠탑이 보이는 멋진 야경을 자랑한다. 이언은 이 완벽한 저녁 식사 계획에 담미가 만족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므씨으 블루의 테라스에 앉자, 센강 너머로 반짝이는 에펠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조명 아래 대리석 테이블이 반사되어 빛났고, 이언은 이 완벽한 저녁 식사 계획에 담미가 감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옆에 앉은 담미는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낭만적인 풍경 대신, 눈앞의 완벽한 상황을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분석하고 있었다.


담미

"음, 일단 BGM으로는 재즈가 깔리고. 큐레이터님이 제게 와인잔을 건네겠죠. 그리고 이런 대사를 칠 겁니다. '작가님, 오늘 이 완벽한 풍경을 대본에 꼭 넣어주십시오.‘ “


담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이언은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언

"작가님, 시트콤 작가로서의 직업병은 잠시 넣어두시죠."


담미

"직업병이 아니라 '창의성'인데요? 큐레이터님은 지금 완벽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거고, 저는 그 계획의 유일한 오점을 발견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고로... 오점은 저예요."


이언

이언은 메뉴판을 들어 올렸다.

“오점은 제가 채워 넣은 겁니다. 이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건축가 조셉 디랑의 작품입니다. 모든 선이 완벽하죠."


담미

그때, 담미가 손가락으로 레스토랑 바깥을 가리켰다.

"근데 저기, 저기. 보세요!"


이언이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그의 시선은 이미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센강을 비추고 있었다. 강물 위로 유람선이 천천히 미끄러져 가고, 강 건너편의 에펠탑은 막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이언은 이 완벽한 타이밍에 감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담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에펠탑을 향해 있었지만, 표정은 왠지 모르게 비장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머... 지금 에펠탑이 반짝이는 게, 꼭 우리 시트콤 시청률 같아."


이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대한 감동 어린 반응과는 너무나 다른, 오직 담미만이 할 수 있는 대사였다.


이언

"내 대본대로라면,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더 빛나 보이는군' 같은 대사를 쳐야 하는데… “


담미

“그렇게 대본을 쓰면 시청자들에게 바로 욕먹어요. 요즘은 그런 클리셰 안 통하거든요.”


이언은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은 계획에 없었지만, 그 어떤 완벽한 웃음보다 진심이었다. 그의 완벽한 저녁 식사 계획은 엉망이 되었지만, 담미의 존재가 그 어떤 완벽한 계획보다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담미의 시트콤에 기꺼이 출연하기로 했다.


이언

"그래. 좋아요. 그럼 다음 대사는 뭐죠?" 하하하.


담미

"아까 전시회에서 본 그림 중에 뭐가 제일 좋았어요? “


이언

“저는 담미 씨가 가장 오랫동안 서 있던 그 그림이요. 담미 씨는 어떤 그림을 좋아하나 궁금해서 한참 쳐다봤거든요."


담미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다 살짝 미소 짓는다.)

“그 그림이요? 제목이… ‘일상을 걷는 연인들’이었나. 특별한 건 없는데 그냥 좋았어요. 평범한 풍경인데, 계속 보고 싶어지는 그런 그림이요.”


이언

(담미의 말을 가만히 듣는다.)

“맞아요. 특별할 것 없는 그림인데 시선이 계속 가더라고요. 근데 사실… 전 그 그림보다 그 그림 앞에 서 있던 담미 씨를 더 오래 본 것 같아요.”


담미

(고개를 들어 이언을 마주 본다. 살짝 놀란 듯한 표정.)

네?


이언

“전시회에 온 목적이 좋은 그림을 보는 거였는데, 담미씨를 보고 있는 게 더 흥미롭더라고요. 담미씨가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마치 다큐멘터리 보는 것 같았어요.”


담미

(작게 웃는다.) “이언 씨는 정말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군요. 그래서 지금 저한테 대본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찍자고 하시는 건가요?”


이언

(진지한 눈으로 담미를 바라본다.)

“글쎄요. 담미 씨가 저한테 시트콤 배우를 제안했으니, 전 담미 씨한테 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어달라고 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이언이 몸을 살짝 기울여 담미 쪽으로 다가온다.)

… 아예 우리 둘 다 주인공인 로맨틱 코미디를 찍는 것도 괜찮고요. “


담미

(장난스럽게 웃으며) 워워. 이언 씨, 너무 급발진 아닌가요? 아직 메인 요리도 안 나왔어요. 우리 시트콤은 첫 화부터 로코 찍는 거 아니거든요. 일단, 오늘은 1부 엔딩쯤으로 하죠.”



이언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1부 엔딩이요? 그럼 다음 이야기는요?”


담미

“다음 이야기는…. (메뉴판을 훑어보며) 이 핑거푸드가 끝날 때쯤 알려줄게요. 원래 작가들이 이래저래 간 보는 게 특기거든요. 이언 씨는 제가 쓴 대본에 맞춰서 연기하면 돼요.”


이언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습니다, 감독님. 그럼 지금부터는 그냥 평범한 저녁 식사인가요?”


담미

“그렇죠.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아주 평범한 저녁 식사요. 물론, 제 시트콤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만 빼면요.”(장난기 섞인 눈웃음)

자~ santé (서로의 잔을 부딪히며 와인을 마신다)


이언

(살짝 당황한 표정) ”다음 대사는요? “


담미

“네. 다음 대사는…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는 척) ‘감독님, 목이 마른데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이 정도가 딱이에요. 궁금증을 유발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처럼 보이죠. 시트콤은 디테일이 생명이거든요."


이언

(피식 웃으며) "알겠습니다, 감독님. 그럼, 목이 마른데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담미

(메뉴판을 보며) "네, 그럼요. 배우님은 물 드시고, 전 와인 좀 더 시킬게요. 오늘 촬영,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네요."



이언은 와인잔을 든 채 창밖의 야경을 응시했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미술품을 큐레이팅하듯 자신의 인생, 그리고 감정까지도 빈틈없이 정리해 왔다. 특히 사랑은 더 그랬다.

몇 번의 뜨거운 만남과 차가운 이별을 겪은 뒤, 그는 더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의 마음은 잘 정돈된 미술관 같았다.


오늘 저녁, 마주 앉은 상대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해외 전시에 관해 사전 협의를 나누기 위해 만난 시트콤 작가, 허담미. 얼마 전, 그녀의 작업실에서 보았을 땐, 뿔테 안경에 말아 올린 머리, 편안한 니트 차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달랐다. 머리를 단정하게 풀고,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의 옷을 입고 있었다. 와인잔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청초했다.


이언

“처음의 격정적인 강함보다, 부드러움이 겹겹이 쌓여 다가오는 전율이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언은 와인 잔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한다)


그들은 와인 한 병을 비우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색함 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이언은 그녀의 눈빛이 장난기 가득한 시트콤 주인공의 그것이 아닌, 깊은 사색을 담은 진지한 작가의 눈빛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다 이야기는 과거의 사랑으로 흘러갔다.


이언은 담담하게 자신의 지난날을 풀어냈다. 실패, 좌절, 그리고 그 이후의 무덤덤함까지. 내일을 위한 희망을 가지고. 그는 그녀에게 솔직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1초, 2초, 3초, 4초, 5초…


담미는 아무 말 없이 이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끔씩 따뜻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이언은 마치 캔버스를 보듯 그녀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의 시야에 그녀의 모습이 온전히 들어서는 순간, 그 시작의 감동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이언은 자신이 완벽하게 정리해 두었다고 믿었던 마음의 미술관 한가운데, 낯선 감정의 그림 한 점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화려하거나 강렬하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시선을 빼앗았다. 그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가 오랜 세월 잊고 지냈던 감동과 전율이었다.



완벽한 여행을 위한 완벽한 사고뭉치

다음 날 아침, 이언의 완벽한 계획대로 그들은 파리 근교 지베르니(Giverny)로 향했다. 이언은 미리 출력해 둔 기차 시간표와 지도를 손에 쥐고 있었다.


담미

"큐레이터님, 우리 왜 지베르니에 가는 거예요?"

담미가 물었다.


이언

"지베르니는 모네의 정원입니다. 빛의 화가인 모네가 인상주의의 정점을 완성한 곳이죠."


담미

"아, 그럼 거기서 모네가 그렸다는 연못도 볼 수 있어요?"


이언

"그럼요. 작가님이 평소 보시던 시트콤 배경과는 차원이 다른… 완벽한 풍경을 보시게 될 겁니다."


이언은 담미에게 완벽한 여행 계획을 설명했다.

기차를 타고, 작은 마을을 둘러보고, 모네의 정원을 거닐며 작품의 배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완벽한 동선이었다.



다음 주 목요일에 다음 화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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