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의 구게왕국

#10 티베트 이야기 - 구게 왕국 가는 길, 피양둥가, 짜다 토림

by 그루


2박 3일 강 린포체(카일라스)트레킹을 마치고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다르첸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밥집 주인은 3일 후에 다시 가니 반갑게 맞아준다. 오며 가며 다르첸에 있는 동안 젊은 한족 내외가 깔끔하게 운영하는 밥집에 들락거렸다. 다르첸에 많은 혜택을 받은 한족들이 대거 이주해서 호텔이나 관광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티베트인이 운영하는 밥집으로 발길을 돌리지는 못했다. 사실 티베트인들이 운영하는 곳을 쉽게 찾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찌 됐든지 보다 나은 삶을 살아내기 위해 이주한 그들도 돈을 많이 벌면 언젠가는 숨쉬기 수월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겠지만, 살면서 이 땅에서 역차별로 불이익을 받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다르첸을 생각하면 춥고 먼지 풀풀 날리던 을씨년스러웠던 숙소가 아니라 따뜻한 밥집을 운영하는 젊은 한족 부부가 생각난다.




라싸로부터 약 1,900킬로미터 떨어진 짜다札達현은 강 린포체(카일라스)에서는 약 290킬로미터에 불과하다. 비록 가는 길이 고도 5,000미터를 넘나드는 고갯길이지만 짧은 거리는 한결 부담이 적다. 가는 길 왼쪽은 히말라야 산맥을 끼고 달리며 오른쪽은 야생동물들만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칭하이성의 커커시리 지역보다 더한 무인지대이다. 황량하지만 다채로운 색깔로 맞아주는 고원은 또 다른 세계의 빛깔이다.


짜다현이 가까워지면 고개에서 히말라야 설산과 함께 광활하게 펼쳐지는 토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유라시아 대륙과 인도아대륙이 충돌하면서 티베트 지역이 인도아대륙 위로 밀려 올라오면서 만들어진 히말라야 습곡 산맥의 살아있는 모습이다. 습곡이란 지층에 생긴 물결 모양의 굴곡을 말하는데 습곡 산맥 fold mountain은 대륙판이 충돌할 때 생긴다. 해발고도 4000미터에서 5,000미터가 넘는 티베트 고원의 주위에는 높은 습곡 산맥이 뻗어 있고 계곡에는 많은 빙하가 발달하여 많은 강들은 이곳에서 발원한다.


토림 전경, 히말라야 산맥의 설산들이 멀리 보인다.


토림을 감상할 수 있는 여러 곳의 뷰포인트가 있지만 딱히 어디랄 것도 없이 지도를 보면 이 지역 전체가 토림의 지질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짜다 현이 위치한 아리Ngari 지역은 라다크, 카슈미르와 접해있어 예부터 많은 문물이 오고 갔던 지역으로 설산 사이 라다크와 아리Ngari의 경계에는 판(반)공쵸Pangong가 길게 가로로 누워있다.




라다크에서 판공 쵸 가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고산 지형을 지나가게 된다. 황량한 산야는 현란할 정도로 다채로운 지질의 색깔들을 보여주며 녹색의 초원은 흐르는 계곡물과 함께 많은 동물들을 끌어들이는 서식처로, 여름 한 철 판공호로 가는 계곡 풍경은 천국에 다름 아니다. 신비로운 산맥들 사이에 홀연히 나타나는 호수는 건너편 국경을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로 넓다. 그 옛날 라다크와 구게 왕국이 쌍벽을 이루어 두 바퀴로 천상의 실크로드를 달리던 시절에는 판공 쵸를 통해 라다크와 카슈미르까지 통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인도 라다크에서 판공 쵸 가는길, 8월의 호수는 수 많은 동식물들이 호수에 기대고 살아가는 계절이다.
판공 쵸 변에 군락을 이룬 엉겅퀴 숲이 고원에 있는 호수와 어울린다.


푸른 빛이 가득한 둥가东嘎 동굴의 벽화


짜다札達현 둥가东嘎마을은 차파랑 구게 왕국 유적지에서 약 4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다. 1992년 발굴되었다는 둥가 Tunggar 유적지는 놀랍도록 엄청난 규모의 완벽한 요새의 모습인데 100미터가량 보이는 절벽은 얼핏 보면 사람이 쌓아 만든 성벽처럼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성벽을 따라 좌우로 닦은 길을 따라 동굴들이 뚫려 있고 동굴 집은 흙과 돌, 나무를 이용하여 앞으로 달아내거나 벽을 마감했다. 건축에 구조물로 들어가는 곧고 굵은 나무는 이 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재료이며 거리가 먼 티베트 동부의 린즈 지역보다는 가까운 히말라야 남부에서 구했을 것이다. 가장 높은 성벽 위에는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 보인다. 동굴에는 아름다운 탕카와 만다라가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 동굴 앞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꽤 많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벽화가 있는 동굴이 나온다. 고산으로 힘들지만 올라갈만한 가치가 있다.
폐허지만 공을 들여 건축한 외벽도 볼 수 있다.
늦은 오후 둥가석굴에서,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곳으로, 낯선 사람들이 높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일 수 있건만 안내인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대충 기다리다 지쳐 내려오려니 생각하나 보다.

동굴 사원 안을 못 본다고 해도 가치가 있을 만큼 자연 성벽은 그 자체로 작품이며,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늦은 오후의 풍경은 내려갈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SF와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고요하고 신비롭다. 아래서 기다려도 사람들이 안 내려오니 그때서야 자물쇠를 들고 멀리서 안내원이 올라온다.


문을 열어주면서 사진은 찍지 말라고 당부한다. 매표를 하고 대표적인 동굴 사원의 방을 들어선 순간, 놀라웠다. 얼마 전 방문했던 라다크 지역에서 봤던 만다라와 거의 흡사한 모습의 만다라 두 개가 맞은편 한 벽안에 다른 그림들과 함께 가득하다. 라다크와 다른 것이 있다면 라다크 사원의 벽화는 어둠에 갇혀있는 둥가 석굴의 벽화들과는 달리 지금도 끊임없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살아있는 대상이라는 것뿐, 정신을 차리고 관찰하면 4면 빼곡하게 그림으로 채워진 벽에는 만다라와 함께 티베트에서 유행하던 십일 면 관음상도 볼 수 있다. 페르시아의 상징인 쌍사자상과 입체적인 천장은 4세기부터 고구려와 발해의 무덤에서 유행한 ‘모줄임천장’을 닮아 흥미롭다.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벽화는 자유롭지만 힘이 있는 필치로 그려져 있으며 훼손된 벽화임에도 불구하고 4면의 벽은 청금석의 빛으로 물들어있는 듯 푸른빛이 가득하다.


벽에는 간혹 금을 입힌 것 같은 자국도 보이는데 가까이 보면 칠한 것이 아니라 금세공을 만들어 붙였다. 금 조각을 벽화에 붙이다니, 이곳은 예사 유적지가 아닌 것이다.


둥가석굴벽화는 아니지만 라다크 알치에서 허락을 받고 찍은 오래된 사원의 만다라


피양皮央 동굴


둥가东嘎촌에서 서쪽으로 약 2킬로미터 이동하면 피양皮央촌이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는 피양촌은 거대한 규모의 토산에 벌집처럼 수없이 뚫려있는 동굴들이 미래도시 같기도 하고,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옷을 벗은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 같다.


마을에 들어서니 유적지 바로 아래 숙박업소들을 짓는지 진입로가 파헤쳐져 있다. 토산으로 올라가기도 전에 우후죽순 숙박업소까지 들어서는 것 같아 괜한 걱정이 앞선다.


잠에서 깬듯, 나는 피양 유적지 앞에서 안토니오 가우디를 떠 올렸다.
피양 석굴 유적지 안쪽에서 보이는 평원
사원의 형체는 문드러졌지만 입구와 잘 다음어 올린 계단은 남아있다.


피양 유적지는 둥가 유적지보다 거대하지만 훼손상태는 심각하며, 지금도 동굴에는 주민들이 창고로 이용하거나 살고 있다고 느낄 만큼 사람 흔적이 남아있다. 산 위 꼭대기에 위치한 사원을 비롯하여 띄엄띄엄 사원과 무너진 쵸르텐도 보이며 색깔을 잃어버린 마니석들은 아직도 나 같은 초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토산의 안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공적인 장소로 추정되는 공간들이 위치하며 인공적으로 다져진 꽤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각도가 큰 U자형으로 굽어있다.


토산을 내려오면서 보니 옆으로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의 거대한 토산이지만 왼쪽과 오른쪽 어느 쪽으로 들어가도 다른 쪽으로 연결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한 번에 움직일 때의 동선도 꽤 유연하다. 둥굴의 숫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약 1000여 개 이상의 동굴이 뚫려있다고 한다. 한 동굴에 한 세대 이상이 살았다고 생각하면 적어도 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변에는 식량을 위해 돌을 쌓아 토양을 보전해야 했던 밭의 형태와 농사를 위해 가까운 강에서 물을 끌어온 수로도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개인의 힘으로는 만들 수 없는 계획적으로 만든 거대하며 아름다운 동굴도시다.


피양 동굴도시의 안쪽 면, 오른쪽 꼭대기 사원의 잔해가 보인다.
피양석굴의 안쪽 전경


구게 왕국의 왕통기 <은가리갸랍>


1992년 처음 발견된가피양(혹은 피양둥가) 동굴 유적의 실체는 1997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인 로베르토 비탈리Roberto Vitali에 의해 밝혀졌다. 그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 티베트 문학 도서관에 있는 3만 5천 권의 티베트 관련 고문서 사이에서 현지 티베트인들의 도움을 받아 15세기 티베트 필사본인 구게 왕국의 역사를 담은 왕통기 <은가리갸랍>을 발견한다. 이 고문서의 발견으로 베일에 싸여있었던 구게 왕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9세기 랑다르마(799~846) 왕의 죽음 이후 200년 티베트 통일의 역사는 뵌교와 불교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죽고 죽이는 왕위쟁탈전에서 패한 왕족들과 그의 일족들은 라싸 밖으로 추방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정착한 무리는 그들만의 지방정부를 세운다.

895년 오랜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랑다르마의 손자(위쏭의 아들)인 패쿠짼의 아들 키이데니마곤은 죽음의 위협에서 탈출하고자 일족과 따르는 자들을 데리고 멀고 먼 서부 티베트로 도주하였다. 그는 아리 지역에 이르러 토착세력이었던 샹슝왕국에 몸을 의탁하였다. 그곳에서 라싸 정통 왕실의 핏줄인 키이데니마곤은 환영받았으며 샹슝 왕국의 딸과 결혼하여 그 땅의 이름 ‘샹슝’을 ‘아리’로 바꾸고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후 키이데니마곤은 호수가 많은 라다크 왕국을, 설산으로 둘러싸인 푸랑(란) 국을, 암석으로 둘러싸인 샹슝(차파랑) 왕국을 세 아들에게 주었으며 차(싸)파랑은 구게 왕국으로, 이후 푸랑 국은 구게 왕국에 합쳐졌다.


<은가리갸랍>에는 라싸에서 온 왕과 일족은 수트레지Sutlej 강기슭의 톨링에 이르러 정착하여 그곳에 도시를 세우고 국가를 건립했다는 왕국의 창건부터 700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했던 왕국의 전반적인 역사가 들어있다. 이 고문서의 내용 중에는 “왕께서 둥가에 도읍을 정하셨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둥가는 구게 왕국(866~1635)의 도읍지였던 것이다.


왕통기로 보아 첫 수도는 톨링Tholing이었으며 왕의 명으로 수도에는 톨링 사원이 지어진다. 활발한 무역과 풍부하고 질 좋은 금의 생산으로 부유해진 구게왕은 린첸짱포Rinchen Zangpo (958–1055)를 비롯한 젊은 승려들을 인도로 보내 불교를 공부시켰으며 대부분의 인도 불교 경전을 티베트어로 번역했다. 1042년에는 인도의 승려 아티샤를 모셔왔으며 카슈미르와 인도에서 데려온 화가와 장인, 건축가들은 궁과 아름다운 사원을 장식했다.


제3대 왕의 딸인 라이메톡 공주의 제안으로 둥가 피양지역에 수도를 옮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어온 금보다 비싼 청금석에서 추출된 파란색은 궁과 사원을 장식하고 둥가 피양은 왕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지금의 라다크에 속한 잔스카르Zanskar 남동쪽과 인도 국경까지 닿아있는 영토로 인해 사통팔달 연결된 무역로와 풍부한 금 생산으로 왕국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마지막 요새 차파랑Tsaparang 구게 왕궁


하지만 15세기 말 대부분의 주변 국가들은 이슬람 국가가 되었으며 전쟁이 잦아지자 위협을 느낀 외로운 불교왕국은 피양둥가에서 방어에 유리한 차파랑(현재의 구게왕국 유적지)으로 수도를 옮긴다.


피양 둥가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차파랑 유적지에도 여지없이 강줄기가 지나간다. 둥가 피양 유적지보다 웅장함과 우아함, 생동감이 떨어지지만 약 200미터 정도의 토산은 좌우 비례가 아름답다.


차파랑 유적지는 보면 볼수록 거대한 개미집처럼 보였다. 수년 전 아프리카 오카방고Okavango Delta 습지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모래 탑이나 흙무덤처럼 생긴 거대한 흰개미 집을 봤을 때의 느낌이었다. 겨우 몇 밀리미터에 불과한 개미들이 사람 키만 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데 때로는 3미터에서 9미터에 가까운 개미집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자연 순환방식의 통풍 시스템은 물론 실내에서 발효 식량을 생산해 자급자족 시스템까지 갖춘 개미집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3미터의 개미집은 약 500미터 높이의 주택이며 9미터이면 약 3,500미터의 집을 짓고 사는 것이라고 하니 자연의 지혜로 지은 이러한 개미집은 맹수들도 절대 건드리지 않을 만큼 강력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오래전 아프리카 오카방고 델타에서 만난 흰개미 집
흰개미 집의 통풍구 및 입구


피양 동굴도시는 길을 몰라도 이곳저곳으로 접근이 가능한 넉넉한 마음으로 설계한 모두에게 열린 구조였다면 차파랑 유적은 길을 걷다가도 어느 순간 길이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거나, 바라보면 가늠할 수 있는 시야 확보가 어렵고, 예를 들면 가다가 돌연 터널이 뚫려있어 어디로 연결되어있는지 찾기가 어려워 다시 돌아 나와야 했다.


수도가 되기 전에도 이곳은 톨링과 함께 매우 중요한 거점 도시였으며 전쟁을 막아내야 한다는 위기감에서 천도한 수도이기에 산성은 당시에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 방어시설에 주력해 치밀하게 설계가 되었을 것이다.


차파랑 토산은 제일 높은 곳은 궁전과 사원을 두었고 산허리에는 승려들이, 아래에는 백성들이 살았던 하나의 거대한 복합도시다.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보루는 발견된 것만 해도 약 58개이며 4개의 비밀통로가 있었다고 한다.


아침햇살 속의 차파랑 구게 왕궁


구게양식의 벽화


다른 곳에 비해 대체로 온전하게 남아있는 절벽 중간에 있는 사원은 아름다운 탕카와 당시의 풍속들이 그려져 있다. 벽과 나무에 칠해진 안료의 선예도는 그림을 너무나 꼼꼼하게 그린 나머지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마친, 방금 마른 것처럼 느껴진다.

티베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타라 여신의 자태는 어디에서 봤던 모습보다도 우아하고 중요한 모티브인 발 바닥과 손바닥은 평면적인 묘사에 음영을 더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둥근 얼굴과 가슴 등의 표현은 매우 농염하기까지 하다. 둥가 석굴의 벽화에서 느꼈던 자유로움은 없지만, 건국 당시 수입했던 인도 불교미술에서 벗어나 시간이 흘러 구게 왕국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이 나타난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이곳에는 둥가 석굴에서 사용했던 낭만적인 푸른색이 사라졌다. 온통 붉은색과 녹색뿐이다. 이곳으로 수도를 천도할 당시에는 이미 이슬람권이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푸른색을 추출하는 청금석을 수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번 건들면 자신에게 치명적이어서 아무리 사나운 맹수도 건들지 못하는 완벽한 방어체계를 갖춘 흰개미 집처럼, 철통 같은 요새였던 차파랑의 구게 왕궁은 라다크 왕조의 오랜 포위에도 완강하게 버텼다. 하지만 성 아래에서 본보기로 매일 학살당하는 백성을 더는 보지 못한 국왕은 1635년 결국 항복을 하고 만다.


왕궁 아래쪽 산책길을 따라 조성된 동굴에 고개를 조금이라도 가까이하면 훅, 이상야릇한 냄새가 나는데,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많은 미라가 된 뒤엉킨 시체들을 볼 수 있다. 수없이 발굴된 무기들과 인골들은 17세기 히말라야에서 동족 간에 벌인 피비린내 진동한 무참한 살육전이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이후 라다크의 세력 안에 있던 구게 왕국은 1679년에서 1680년 무렵 라다크 세력을 몰아낸 5대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중앙 정부에 편입되었다.


녹색 점은 토림의 분포도이며 하늘색은 수트레지강과 그 지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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