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바래봉에 왔어요”

# 남원 운봉마을 바래봉 철쭉제

by 그루


올해의 꽃놀이는 산수유와 매화만으로 만족했다. 기대했던 즐거움 그 이상이었다. 3월, 매화마을에서 빠져나와 광양 시내의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툇마루에 분홍빛 철쭉으로 뒤덮인 봉우리를 찍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꽃분홍색 산봉우리는 촌스럽게 느껴질 만큼 잘 찍은 사진은 결코 아니었지만 “어떻게 저런 풍경이 나오지?” 생각한 순간 “저기가 어디예요?”라고 입에서 튀어나왔다. 계산을 하던 주인장은 대뜸 “운봉이요. 남원에 있는 운봉”이라고 대답한다. “저걸 보려면 5월에 가야 해요.” “오월이라,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 오월에 나는 과연 저곳에 갈 수 있을까.”



대표적인 철쭉 군락지로 이름이 알려진 곳은 장수와 남원 아영면에 걸쳐있는 봉화산과 합천과 산청에 걸쳐있는 황매산 그리고 남원 운봉읍에 위치한 바래봉이라고 한다. 5월 중순 지리산 바래봉 철쭉은 올라가기 시작하는 임도에는 시들어 있었지만 2번 쉼터 근처부터 바래봉 봉우리와 팔랑치까지 절정을 이루었다.


임도에 핀 철쭉


오전 7시가 조금 지나 용산(지리산 허브밸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남원에 도착해서 아침까지 먹었으니 서울에서 이 시간에 도착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주차장에는 우리만큼 부지런한 사람들이 몇몇 와 있었다. 바래봉의 이름은 승려들이 사용하는 그릇인 발우에서 나왔다. 발우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봉우리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내리막길이 없고 무조건 올라가야 한다. 마음이 들떠 오르는 길은 경사가 꽤 가파르지만, 사나운 돌길이 아니어서 더없이 즐겁고 편하다. “아! 지리산은 육산이구나!” 풍화가 빠른 암석인 편마암이 지리산의 기반암인 것이다. 일정한 거리마다 쉬어가는 쉼터가 있는데 구급약도 비치가 되어있다. 배려심이 느껴져 기분이 좋다. 가는 길 내내 철쭉 외에도 병꽃물참대 등이 한참이다. 특히 병꽃은 붉은 병꽃과 삼색병꽃까지 팡파르를 부는 것처럼 생긴 길쭉길쭉한 나팔 모양의 자태가 우아하기까지 하다. 동네 공원에서 관상용으로 심어놓은 작고 귀여운 병꽃과는 확실히 다르다. 삼색 병꽃은 인동초처럼 꽃의 색깔이 시간이 갈수록 변한다. 그래서 한 가지에 밝은 노랑, 분홍, 자줏빛까지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병꽃나무
물참대
삼거리 부근의 구상나무 군락지


5개의 쉼터가 나오면 중요한 포인트인 바래봉 삼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표시이다. 삼거리 가까이 오면 나타나는 쭉쭉 뻗은 구상나무 군락지가 이국적이다. 구상나무는 쉽게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겨울날 눈 쌓인 구상나무를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팔랑치에서 돌아올 때 보니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 분들이 많았다.

삼거리에서 직진해 올라가면 바래봉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철쭉 군락지인 팔랑치로 향한다. 이곳에서부터는 정신줄을 놓아도 좋다. 아니 감동의 만족도가 극도로 치솟아서 몸의 무게감을 못 느낄 만큼 날아다닌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천상의 화원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바래봉 정상석 앞에서 찍는 인증샷도 누구 하나 화내는 이 없이 순서대로 차례를 지킨다.


팔랑치 철쭉 군락지를 걸어가는 행위는 철쭉의 바닷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다. 철쭉의 키가 어른 키를 훌쩍 넘기 때문이다. 특히 팔랑치 쪽으로 가는 길에 유난히 많은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빛 철쭉나무는 키도 더 크고 이파리는 연둣빛이며 꽃잎은 더 둥글고 긴 눈썹은 하얗다. 철쭉의 얼굴에 있는 까만 죽은깨를 가리기에도 충분한 긴 눈썹은 어찌 그리 귀엽고 새침한지.


철쭉을 보러 왔으니 바래봉 등반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정신없이 철쭉에 빠져 있다 나오면 그뿐이다. 오전 7시 30분경 올랐던 바래봉 철쭉 구경을 마치고 주차장에 내려왔을 때는 오후 1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연분홍빛 철쭉, 일반 철쭉보다 꽃잎이 더 둥글다.
팔랑치의 철쭉


바래봉 오르는 길에 신나서 지리산을 좋아하는 분께 전화를 드렸다. “드디어 바래봉에 왔어요”, 했더니 내려오는 길에 얼굴이나 보잔다. 내려가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너무 좋았다고 행복해했더니 “해가 갈수록 녹색의 식물들이 키가 자라, 철쭉이 예전만큼 돋보이지가 않아요”라고 하시면서 예전만 한 풍경을 못 보여준 것을 아쉬워하신다.


바래봉은 지리산의 이름난 봉우리보다는 훨씬 낮은 고도지만 1,165m로 꽤 높다. 바래봉을 오르는 길에는 바래봉에 철쭉 풍경이 만들어진 경위를 유추할 수 있는 안내판이 있다.

‘지리산 바래봉 일원은 1971년 우리나라 최대의 면양 목장(2,400ha)으로 1993년 목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면양 방목을 위한 외래 목초지로 이용되어 생태계가 훼손된 지역입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생물 다양성 회복을 위해 자연천이를 촉진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양과 염소는 식물의 뿌리까지도 먹는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바래봉이 철쭉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양들이 산봉우리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은 다 먹어 치우고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는 철쭉만 남겨놓은 결과이다. 만약에 목장이 문을 닫지 않았으면 지금쯤 바래봉은 녹색의 식물과 나무들이 씨가 말랐겠다. 목장이 폐쇄된 이후 5월이 되면 황홀한 철쭉 풍경은 많은 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색적이고 쨍하며 아름다운 철쭉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른 식물의 복원으로 그동안 보았던 빼어남은 사라지겠지만 서서히 돌아와 같이 어우러진 자연도 아름다울 것이다.

20220510_103627-01.jpg 주차장~삼거리~바래봉~삼거리~팔랑치~주차장


바래봉을 다녀와서 처음으로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들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인 지리산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라고 쓰여 있다.

시간만 나면 자주 찾았던 설악산과는 달리 지리산은 남쪽에 방대하게 걸쳐있는 산으로 신비하고 아름답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였다. 바래봉을 올랐으니 이미 노고단도, 달궁계곡도, 뱀사골도, 반야봉과 천왕봉도 내 관심 사항이 되어 버렸다. 지리산 달궁계곡으로 꼭 놀러 오라던 그분께 “물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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