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의 에스토니아 일정이 끝났다. 무엇보다도 햇살이 투명한 날, 비루 습지에서의 트레킹과 카드리오로그 지역의 궁전과 쿠무미술관을 즐겼던 하루가 행복했다. 여행의 끝은 늘 아쉽다.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면 에스토니아에서 최초로 신문이 발행된 페르누와 한 때는 스웨덴 바이킹을 장악할 만큼 용맹했던 사람들의 땅 사레마 섬에 다녀오고 싶다.
타르투에서 리가로
Tartu에서 라트비아 리가Riga로 간다. 이른 새벽 6시, 호텔 카운터에서 도시락을 받았다. 리가까지 가는 동안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이 여의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제저녁 산책하고 호텔에 들어가면서 “내일 새벽에 떠나니 우리는 아침을 먹을 수가 없다. 혹시 도시락이 가능하냐”라고 했더니 흔쾌히 내일 새벽 6시에 준비해 놓겠다고 했었다. 6시 30분에 출발하는 첫 차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왔다. 터미널이 지척이니 너무 편하다.
10시 30분, 타르투에서 출발 4시간 후 리가에 도착했다. 차분한 분위기의 에스토니아와는 다른 숨길 수 없는 활기가 느껴진다. 터미널 매점에서 일주일 용 유심을 1.49유로에 구입했다. 발트 세 나라가 사용하는 공용 유심이 있을 것 같지만 없다.
터덜터덜 캐리어를 끌고 호텔을 찾았다. 가깝지만 직선 도로가 없어 돌아가느라 조금 애썼다. 구시가지와 붙어있는 호텔은 분주하다.
리가의 격납고, 아름다운 중앙시장
중앙 마켓을 지나가는 트램이다. 트램은 구시가지와 아르누보거리를 이어준다.
방에 올라가니 창밖으로 중앙시장 4개의 격납고가 보인다. 다섯 동 중 한 동은 방향이 달라 자세히 봐야 한다. 4일을 묵으며 아침저녁으로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놀라운 구조물인 중앙 마켓 격납고를 바라보며 연신 카메라를 눌러댔다. 철을 사용한 실용적인 구조물로는 단연 으뜸이다. 철재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에펠탑 이후 중요한 건축재료로 부상할 때였다. 원래는 라트비아 서부 Vainode 기지(독일과 러시아, 구 소련까지 사용했던 발트지역의 중요한 군사 공항)에 위치한 체펠린 격납고Zeppelin hangars의 설치물을 분해하여 리가로 가져와 대형 시장으로 리노베이션 한 것이다. 철재이기에 가능했다.
1941년 독소전쟁에서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900일 동안 봉쇄했던 독일은 Vainode 체펠린 격납고에서 비행선을 띄워 레닌그라드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던 곳이다. 독일의 공학자 체펠린 Zeppelin(1838~1917)이 처음 설계한 비행선을 발전시킨 체펠린 비행선은 길이가 236.6m로 60톤의 짐을 나를 수 있었다. 격납고는 거대한 비행선을 위한 곳이었다. 격납고 왼쪽 뒤편으로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양식 건축물이 한 동 불쑥 올라와 있다. 깜짝 놀라 지도를 찾아보니 라트비아 과학원 건물이다. 스탈린 양식의 건물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1931년 뉴욕시에 철골 구조로 지어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1954년까지 세계에서 제일 높았다)에 자극을 받은 스탈린(1878~1953)은 자신과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장 높고 큰 건축물을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한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7개의 건축물을 ‘모스크바 세븐 시스터즈’라고 부른다. 흡족했던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이었던 라트비아(라트비아 과학원)와 폴란드(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에도 스탈린 양식의 건물을 선물했다. 넓은 단 위에 좁은 단이 계속 올라가는 케이크 모양의 건물을 보고 현지인들은 ‘스탈린의 생일 케이크’라고 비꼬았다.
현대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동적인 형태를 갖춘 격납고 형태를 그대로 살린 시장은 도시에 활기를 부여하는 랜드마크다. 시장 옆에는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있어서 기차를 타러 가거나 터미널에 가려면 시장 옆을 지나야 만 했다. 다우가바 강물이 들어오는 도시 운하의 제방 위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거대한 격납고는 터미널에서 바라보면 반영으로 인해 더욱 아름답다. 반영 아래 깔려있는 운하의 짙은 녹조는 가릴 수 없는 리가의 뒷골목이다. 격납고 다섯 동 밖으로는 규모가 큰 꽃가게와 라즈베리와 블루베리를 비롯한 알록달록한 과일들이 진열된 과일가게가 많아 눈과 입을 현혹한다. 리가에서 처음 맛본 생 라즈베리의 향기와 맛에 반해버렸다.
버스터미널에서 바라 본 중앙 시장 격납고
비가 내린 후, 리가의 중앙시장 야경. 왼쪽에 '스탈린의 생일 케이크'라고도 부르는 '라트비아 과학원 건물'이 보인다.
리가Riga는 800년이 넘는 역사도시이며 라트비아의 수도이다. 발트해와 연결된 다우가바강이 리가 시내를 흐른다. 바다로 열려있는 도시는 자연스럽게 상업도시로 발달하였다. 12세기 중반 이후, 선교를 앞세워 들어온 욕망에 가득 찬 독일인 선교사와 상인들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에 이미 둥지를 틀고 있었다. 1201년 브레멘에서 온 알브레히트Albert von Buxhoevden 주교는 ‘북방 십자군’을 모집하고 조직하여 선교를 위해 이교도의 땅인 리가로 들어왔다. 당시 브레멘은 대주교구청이 있었으며, 독일의 자치 공화국으로 북부 유럽을 담당하는 기독교의 선교와 경제를 주도하는 중심지였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알브레히트 주교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독일기사단)’을 만들어 무력으로 이교도들을 정복해나갔으며 거센 저항에는 잔인하게 대처했다. 독일기사단의 악행은 교황청에까지 알려져 기사단은 결과적으로 1237년 튜튼 기사단에 흡수 합병되었다. 리가는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한자 동맹의 중심도시로 더욱 번영을 누렸다. 1559년 발트의 항구가 필요했던 러시아 이반 4세의 점령(리보니아 전쟁 1558~1583)으로 독일기사단은 쇠퇴했지만 라트비아는 폴란드의 지배하에 들었다가 1621년부터 스웨덴의 지배하에 놓였다. 1721년에는 스웨덴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한 러시아가 점령하였다. 1918년 잠시 독립하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이 진주했으며 이어 소련에 합병되었다가 1991년 독립하였다.
마치 발트라는 공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뺏고 빼앗는 악순환에 시달린 주민들의 고통과 인내심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처절 그 자체이다. 소련의 강제 병합 이후 라트비아인의 인구는 줄고, 대신 환경이 좋은 라트비아로 이주한 러시아인은 많아졌다 특히 리가는 현재도 러시아인의 비율이 높다.
스웨덴문, 스웨덴 점령시절 이문을 나서면 스웨덴군의 막사가 있었다./화약탑, 현재는 해양박물관이다.
리가는 역시 리가다.
“영화계에 따르면 ‘하얼빈’ 팀은 2023년 1월 20일 라트비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11월 10일 자 헤럴드경제 기사이다. 이처럼 라트비아의 리가는 이미 한국 영화계에서는 낯익은 촬영지다. 류승범 감독의 2013년 작 ‘베를린’은 많은 부분 리가에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트비아는 13세기 이후 중세를 관통하며 독일 기사단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어서 독일 분위기가 지배한다. 경제적으로 서부 유럽이나 북유럽보다 가성비가 좋다. 분위기는 자유로우며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과 한국영화에 호의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 거장인 김기덕 감독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한국을 떠나 라트비아의 휴양도시 유르말라에 집을 구입하고 정착하려다가 2020년 12월 11일 코비드 19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곳도 라트비아이다.
한자동맹 도시들 중에서도 가장 부유했던 도시 중의 하나였던 리가는 심지어는 소련의 강제 합병 시절에도 소련 연방에서 가장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중의 하나였다. 건축가 미하일 아이젠스타인과 그의 아들인 전함 포템킨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의 도시인 리가는 글로벌 도시답게 유명인사들의 고향이었거나 그들이 꽃을 피운 도시였다.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고향이며, 한국에도 알려진 '백만송이 장미'의 작곡자 라이몬즈 파울스 또한 리가 태생이다.
리가의 반원형의 구시가지(리가 역사지구)는 1201년을 시작으로 독일기사단(리보니아 검의 기사단)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중세의 흔적을 알려주는 건축물은 거의 독일 기사단에 의해 세워진 건축물이다. 하지만 상업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 도시였던 리가는 전쟁이 거듭될수록 당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당연히 구시가지의 교회들은 처음 세워진 후 개축과 재건을 반복했다. 그 중에서도 St. Peter’s church와 대성당 그리고 시청사와 검은 머리 전당은 리가의 올드타운에서 가장 강력한 랜드마크이다.
St. Peter’s church는1209년 처음 건축되었다. 도시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800년이 넘는 교회는 그만큼 나이가 들어 보인다. 교회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123m의 탑은 철재를 사용해 만들었지만 원래는 나무로 만든 탑이었다고 한다. 철재의 느낌 때문인가, 아르누보 스타일과도 묘하게 닿아있다. 꽃에서 느껴지는 볼륨감이 있는 탑의 형태를 보자마자 인도 무굴제국의 미나렛이 연상되었다. 탑의 끝에는 황금 수탉 모양의 풍향계가 걸려있다. 탑은 층마다 개방감이 있어 도시의 전망대로 훌륭하다.
세월의 흔적은 시대별로 다른 건축 양식으로 만날 수 있다. 바로크식(르네상스 양식까지 나타난다.)으로 꾸민 교회의 파사드. St. Peter’s church
교회 뒤편에는 ‘브레멘 음악대’ 동상이 있다. 관광객들은 네 마리(당나귀, 개, 고양이, 닭)의 동물을 만져보거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혹자는 어릴 적 접했던 동화 속 이야기를 떠올리는지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다. 어린 아이거나 어린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백설공주, 라푼젤, 개구리 왕자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동화는 19세기 초반, 작가이며 언어학자인 독일의 ‘그림 형제’에 의해서 수집되어 퍼져나갔다. ‘브레멘 음악대’도 그중의 하나이다.
‘브레멘 음악대’는 쓸모가 없어져 학대를 당하거나 버려지거나 죽을 위기에 놓인 네 마리의 동물들이 의기투합하여 자유로운 땅 브레멘으로 가는 여정을 그린 동화다. 코믹하고 행복하게 마무리를 지었지만 농노들의 힘든 삶이 투영된 이야기다. 브레멘 시는 알브레히트 주교가 리가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리가 시에 브레멘 음악대 동상을 기증하였다. 침략자를 기념하는 의미의 구조물은 침략자인 알브레히트 주교와 독일 기사단을 각인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알브레히트 주교의 살벌한 통치는 빛을 발하여 리가는 주교구에서 대주교구가 되었다.
맞은편에 있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대성당은 원형과 함께 15세기와 18세기에 개축되었다. 경쾌하면서도 날렵한 탑을 가진 피터 성당에 비해, 대성당은 작지만 멋진 돔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조화가 균형감을 이룬다.
St. Peter’s church 뒤편에 있는 브레멘 음악대 동상/대성당(돔성당)
검은 머리 전당House of Blackheads
광장에서 만나는 검은 머리 전당의 동화적인 느낌의 외관은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게오르기우스Georgius 형제단에서 분리되어 나온 Blackheads 형제단은 외국인인(주로 독일) 미혼 상인과 선주로 구성된 길드였다. 18세기 초, 건물이 길드의 완전한 소유가 된 이후에 꾸며진 파사드에는 검은 머리 길드를 상징하는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당시에도 너무나 특별한 건물은 1941년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다시 리가에 들어온 소련은 폐허화된 잔해를 치웠다. 현재의 건물은 리가에서 태어난 Parex Bank의 사장인 카르긴스Valērijs Kargins(1961~)가 제공한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많은 기부자들의 노력으로 1999년 복원되었다.
박공 끝을 지붕보다 높게 만들어 경사를 계단식으로 장식하는 형태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독일 문화권과 북유럽 건축에서 많이 나타난다. 지붕 꼭대기에서 이어지는 가파른 경사는 곡선이 들어간 문양과 조각으로 장식해서 파사드까지 연결시켰다. 화려함 때문일까, 공주박물관에 있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한 쌍의 왕비관 꾸미개가 뜬금없이 생각난다. 대문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리가 문장을, 왼쪽에는 성 모리셔스(=Mauritius, Maurice)와 검은 머리 형제단 문장을 배치했다. 성인의 얼굴을 검게 표현한 이유는 성 모리셔스의 태생(지중해인들의 얼굴은 검지 않다. 이집트 남부 누비아와 수단 사람들의 얼굴은 검다)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대 기록대로 테베(룩소르) 출신의 군인이었다면 얼굴은 검지 않다. 문맹률이 높은 당시 유럽에서 그림은 곧 글과 같았다. 검은 얼굴색은 인기가 많은 성 모리셔스를 다른 성인들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며, 아프리카 태생 성인이라는 것을 알기 쉽게 이미지화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와 리가 문장을, 왼쪽에는 성 모리셔스와 검은 머리 형제단 문장을 배치했다. 위에는 네 도시의 문장과 수호신이 보인다.
검은머리 전당의 지하실, 14세기경 벽과 바닥, 심지어는 나무계단까지 당시 리가의 건축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다.
성 모리셔스는 3세기에 이집트 테베(현 룩소르)의 지휘관으로 부대원들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3세기 말에서 시작되어 5세기 말까지 이어진 바가우데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모리셔스의 군대가 동원되었다. 당시 제국의 서쪽을 통치하던 황제(당시 로마는 4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사두 정치 체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재위 286~305)는 승전 축하연에서 이들에게 로마의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것을 요구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색출을 명령했지만 모리셔스 군대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가우눔Agaunum에서 결국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인 성 모리셔스를 선두로 지휘관과 부대원들 모두 처형되었다. 아가우눔은 스위스 휴양지로 이름 높은 ‘생 모리츠 앙 발레’ 지역이다.
성 모리셔스의 순교와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 죽음을 확인한 로마 군인 ‘롱기누스의 검’과 세월을 뛰어넘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우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성 모리셔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헝가리 황제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처럼 모리셔스의 창과 칼, 박차는 유럽, 특히 독일 문화권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 문화권인 리가를 비롯한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모리셔스를 수호신으로 삼았으며 모리셔스 이름과 관련이 있는 교회는 너무나 많다.
파사드와 박공을 유겐트슈틸로 아름답게 장식한 조각품과 광장에 있는 Roland 동상은 독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온 August Volz(1851~1926)의 작품이다.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리가를 꾸미기 위해 그의 작업실은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겐트스틸Jugendstil, 즉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이 정점을 찍을 때였다. 그래서 검은 머리 전당의 파사드에도 아르누보(=유겐트슈틸) 스타일이 구현되어 있다. 박공의 중앙에는 아더왕의 보주와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바다를 상징하듯 푸른색의 천문시계가 걸려있고, 파사드에는 리가와 주요한 교역 상대인 브레멘, 뤼베크, 함부르크 문장이 있으며 문장 아래는 포세이돈, 조화와 균형을 상징하는 하모니아Harmonia, 에이레네Eirene(평화) 그리고 헤르메스(전령)를 배치했다.
티켓을 구입하고 들어간 검은 머리 전당 뮤지엄 내부는 검은 머리 형제단에 관련된 각종 자료가 있어 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특히 뮤지엄 지하실은 14세기경 벽과 바닥, 심지어는 나무계단까지 당시 리가의 건축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
광장에 있는 롤랑이 들고 있는 칼 끝은 리가의 중심이다. 롤랑은 샤를마뉴 대제의 12 기사 중 한 사람이었던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그 롤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