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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Apr 09. 2023

리가의 '좋은 시절'

# 라트비아 - 리가, 아르누보 거리

# 라트비아 - 리가 Old town# 라트비아 - 리가 Old town

체시스Cesis를 다녀온 오후, 중앙시장 앞에서 트램을 타고 아르누보 거리로 나섰다. 그렇게 맑았던 하늘은 비가 곧 쏟아질 것처럼 꾸물꾸물하다. 좋은 사진은 틀렸다. 하지만 비가 쏟아져도 아르누보 거리는 가야만 했다. 내일은 리투아니아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예술분야에 걸쳐 나타났던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은 189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산업혁명의 결과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향유하던 시기에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유겐트스틸jugendstil,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Liberty 양식, 프랑스에서는 Guimard 양식이라고 불렀다. 아르누보의 출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회상하는 소위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기(19세기말~1차 세계대전 발발 전)와 맞물린다.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유럽대륙은 한 시도 바람 잘 날이 없을 만큼 전쟁은 일상이었다. 서로 더 좋은 땅과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러더니 그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처럼 다른 대륙의 넓은 땅에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그 시절 너도나도 택한 제국주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의 침략에 몰두하던 시기였으며 식민지에서의 착취와 자국 노동자들의 살인적인 희생 덕으로 전에는 맛보지 못한 최고의 성장과 물질의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다. 중산층들의 출현은 소비활동을 촉진시켰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양식의 예술 형태가 나타났다. 

     

19세기에는 일본 판화에서 시작된 자포니즘의 열풍이 인상파를 비롯한 유럽 미술계를 휩쓸고 있었다.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과 라파엘 전파의 회화에서 영향을 받은 아르누보는 1894년을 기점으로 알퐁스 무하Alfons Mucha(1860~1939)의 포스터가 돌풍을 일으켰다. 프랑스 건축가 기마르Hector Guimard(1867~1943)는 최초의 아르누보 형식의 아파트인 파리에 있는 카스텔 벨랑제Castel Béranger(1894~1899)와 1962년 철거한 바스티유 지하철 입구, 파리 지하철 Porte Dauphine 역사 입구를 아르누보 스타일로 디자인하였다. 


Hector Guimard의 작품 바스티유 지하철 입구/ 빅터 오르타의 Tassel House stairway (출처 en.wikipedia.org)


이처럼 건축에서의 아르누보 운동은 식물에서 볼 수 있는 유연한 곡선을 차용했으며 건물의 파사드에는 독특하고 눈에 띄는 장식이 많아졌다. 벨기에 출신 빅터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와 앙리 반 데 벨데Henri van de Velde(1863~1957)는 이것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아르누보는 흐르는 듯한 곡선과 구조, 장식적인 형태와 그에 따르는 상징성으로 당시 유행하던 네오고딕이나 고전주의에 바탕을 둔 건축양식이 아닌, 비전통적이며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는 건축과 실내 디자인을 아우르는 예술 양식이 되었다. 과거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Nouveau’ 예술로 등장한 아르누보 스타일 건물은 유럽 각지에서 10여 년에 걸쳐 활발하게 건축되었다. 현재는 벨기에와 체코 프라하, 바르셀로나와 오스트리아 비인 등에 많이 남아있으며 750여 채에 달하는 리가가 가지고 있는 아르누보 건축물의 양은 다른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당시 아르누보건축물의 파사드를 장식하는 조각가의 공방은 밤낮없이 일거리가 넘쳐났다. 특히 조각가 August Volz의 공방은 거대한 회사로 거듭날 만큼 리가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미하일 에이젠슈타인/ Building on the corner of Alberta iela and Strelnieku iela
미하일 에이젠슈타인/ Building on Alberta iela 4
미하일 에이젠슈타인/ 위 건물의 문


19세기 리가는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이 헐리고 그곳에 신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이곳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아르누보 건축물들이 세워졌다. 엘리자베트Elizabetes가와 알버트Alberta거리 스트레니쿠Strēlnieku 거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아르누보거리는 그야말로 백 년 전 거리이다.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은 실내 인테리어와 가구까지 아우르는 디자인으로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당시에는 신시가지였던 이 거리에서 부유한 중산층들은 그들의 부를 아낌없이 과시했다. 따라서 아르누보 건축물의 외관만 보는 것은 실로 알맹이가 없는 찐빵을 맛보는 셈이다. 리가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미하일 에이젠슈타인Mikhail Eisenstein(1867~1920)은 1901~1906년 동안 아르 누보 스타일 건축물을 많이 설계했다. 그는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영화감독 Sergey Eisenstein(1898~1948)의 아버지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의 파사드를 보면 한 편의 연극무대처럼 그로테스크한 두상과 상상의 동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표식 등이 넘쳐난다. 기괴하기까지 한 두상으로 장식한 그의 건물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메두사의 머리를부적으로 사용한 로마시대 건축물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건축물에는 입을 벌리고 있는 메두사의 머리 같은 장식이 셀 수 없이 많다. 후반기 1904년 경부터 1906년에 걸쳐 그가 설계한  건물의 파사드에는 색깔이 더해졌다. 인기 있는 건축가였던 그는 고객의 요구에 맞춰 장식을 디자인하기도 하였다. 리가에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약 20여 채에 달한다.     


1906년 작/ 미하일 에이젠슈타인
 미하일 에이젠슈타인 1903년 /Building on Alberta iela 8

 

1905년경부터 약 4년간 리가에는 벽돌이나 금속 같은 재료의 원래 질감과 색을 그대로 노출하거나 라트비아의 전통적인 문양이나 뾰족한 첨탑 등 북유럽과 라트비아의 민족적 색채를 덧입힌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들이 활발하게 세워졌다. 민족적 낭만주의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아이젠 라우베Eizens Laube(1880~1967)와 바나그스Aleksandrs Vanags(873~1919) 등이다. 그들의 작품은 언뜻 보면 칙칙해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건축물인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알베르타와 브리비바스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민족적 낭만주의 아르누보 스타일, 1904년 Konstantins Peksens/ 엘리자베트 거리 13
민족적 낭만주의 아르누보 스타일, 1908년 Eizens Laube


아르누보 운동이 힘을 잃은 1910년 경에는 네오고딕 양식이 더해진 수직적인 느낌의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이 설계되었다. 이 시기의 건물은 구시가지 마이스타루Meistaru 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고양이의 집으로 유명한 노란색 건물이다. 지붕에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은 고양이 두 마리가 올라가 있다. 고양이로 인해 유명한 이 집은 프리드리히 쉐펠Friedrich Scheffel이 1909년에 지었다. 건물은 중세 양식이지만 간결한 아르누보 문양이 전반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메인 홀 입구에는 확실한 아르누보의 장식을 취하고 있다. 아르누보 운동은 15년 정도에 불과한 짧은 기간 불타오르다가 일찍 꺼졌다. 하지만 모더니즘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으며 순수미술과 공예, 디자인과 조각, 그리고 건축까지 아우르는 디자인의 통일성을 추구한 최초의 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프리드리히 쉐펠Friedrich Scheffel, 1909년/ Meistaru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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