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 Nov 15. 2022

폐허, 그 자체를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 에스토니아  - 타르투


탈린에서 오전 8시 Lux버스를 타고 10시 30분 타르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두 시간 반은 여행자에게 순식간에 지나간다. 처음 보는 풍경을 정신없이 훑다 보면 도착지는 금방이다. 언제인가부터 장거리 버스를 타야 할 경우엔 할 수만 있다면 앞자리에 앉는 습관이 생겼다. 2층 버스인 경우에 한해서다. 창구에서 표를 구입할 때는 어렵지만, 예약을 할 경우 좌석을 지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앞 좌석이 없어 편한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나가는 풍경을 제약 없이 감상할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리니 예약한 호텔이 길 건너에 있다. 내일 이른 새벽 첫차로 라트비아 리가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으로 예약했다. 호텔 이름인 Dorpat를 찾아보니 타르투Tartu를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스웨덴 또는 독일어이다.


가방을 던져놓고 호텔 옆 강가로 나왔다. Emajõgi강은 보르츠야르브Võrtsjärv 호수(타르투 왼쪽)에서 타르투의 도심을 관통하여, 에스토니아에서 제일 큰 호수인 페입시Peipsi 호수(타르투 오른쪽)로 흘러가는 길이가 약 100Km에 달하는 강이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어머니 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충분하다. 페이푸스 호수라고도 부르는 Peipsi 호수는 러시아와 국경을 이룬다. 러시아 쪽 호수 옆에는 장인들이 많은 러시아의 역사적 도시 ‘프스코프’가 지척이다.


타르투 시청사 광장
‘Kissing Students’,  Mati Karmin

Kaarsild(아치 다리) 앞에서 왼쪽으로 올라가 시청사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이 포장한 자갈돌로 반짝반짝 빛난다. 그것보다 더 빛나는 것은 1998년, 시청사 앞 분수 중앙에 세운 Mati Karmin의 브론즈 ‘Kissing Students’다. 적막할 정도로 평온한 광장에 젊음이 내뿜는 힘찬 동세는 광장을 깨운다. ‘Pig’를 비롯한 작가의 브론즈 작품을 서너 개 봤지만 그중 백미다. 콕 집어서 ‘Kissing Students’라고 한 것은 모름지기 타르투는 학교와 학생을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다.

    

타르투는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이다. 수도인 탈린보다 200년가량 앞서 기록에 나타 날만큼 역사가 있는 도시이며 다른 도시보다 에스토니아인들의 비율이 높다. 타르투의 심장인 타르투 대학은 스웨덴 지배를 받고 있었던 1632년 개교했다. 스웨덴 아돌프 구스타프 2세(1561~1721)가 B. J. Skytte(1577~1645)의 제안을 받아들여 설립했는데 Skytte는 타르투 대학의 초대 학장이다. 웁살라Uppsala 대학에 이은 스웨덴의 두 번째 대학이었다. 설립 당시는 명망 있는 독일인과 스웨덴의 자제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 전쟁으로 오랫동안 폐교가 된 대학은 1802년(당시 러시아 지배)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 의해 타르투 대학으로 다시 설립되었다. 그의 명으로 발트의 농노들이 제한적으로나마 해방되어 농노의 자녀들도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861년에는 알렉산드르 2세 때 일어난 러시아 농노해방의 영향으로 많은 에스토니아인들이 입학하여 바야흐로 에스토니아의 지식인들을 배출했으며 엘리트들을 세계적 석학으로 길러냈다. 지금도 여전히 북유럽에서 손꼽히는 대학이다. 인구 약 10만 명에 2만 명 정도의 인구가 대학과 관련이 있으며, 최고법원과 우리나라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교육문화부, 에스토니아 국립 박물관까지 타르투에 있다. 걷다 보면 강의실이 도처에 산재해 있고, 거리는 대학과 관련된 곳이 허다하다. 탈린이 에스토니아의 심장이라면 타르투는 에스토니아의 머리이다.


타르투 대학 본관, 6개의 기둥이 인상적이다.
19세기 중반 타르투 대학 본관 모습이 강의실 외벽에 그려져 있다.


광장 끝에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건물이 있다. 1793년 건립한 건물은 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1761~1818)의 저택이었다. 그의 집안은 스코틀랜드 출신 독일인으로 그는 리가(혹은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났다. 젊은 나이인 30대에 이미 타르투 시청사 광장에 대 저택을 갖고 있었던 독일계 귀족계급이었다. 보로디노 전투를 비롯한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러시아 야전 사령관으로, 말년에는 왕족(prince)의 타이틀까지 얻게 된 성공한 독일계 발트인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은 1812년에 발발했으니 그의 나이 50대가 넘었을 때이다. 저택은 오른편이 과거에 있던 건물터에 걸려있고 왼편은 지반이 약하여 무게중심을 잃고 계속 쓰러지고 있다. 경사는 평범한 이 건물을 세상에 회자되게 만들었다. 지금은 Tarut Art Museum으로 사용한다.      


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의 집, 지금은 Tarut Art Museum이다.

타르투의 사람들


타르투 대학 뒤쪽으로 연결된 토메매기 언덕에는 타르투대학과 관련된 인물이거나 재직 또는 졸업해서 여러 분야에 괄목할만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래도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보노라면 타르투의 정신과 에스토니아의 저력이 느껴진다.

천문학자인 스트루베F. G. struwe와 노벨 화학상(1909)을 받은 빌헬름 오스트발트, 문화 기호학의 지평을 연 유리 로트만Juri Lotman(1922~1993)과 비교 발생학, 특히 동물 발생학에 업적을 남긴 카를 베어Karl Ernst von Baer(1792~1876)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타르투 대학 본관 근처 건물 로비에서 Jaan Tönisson(1868 ~ 1941)을 만났다. 그는 타르투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조국의 어려운 시기에 에스토니아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이다. 잠시 에스토니아의 총리와 대통령직을 역임했으며, 1940년에 소련 점령군에 체포되어 타르투 감옥에 있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식이었다고 한다. 마치 김구 선생님이나 안중근 의사를 만난 것처럼 유전자에 간직한 아픔은 쉽게 공유되나 보다. 꽉 다문 입을 하고 걸어오듯 서있는 모습이 형형하다. 작가가 진심을 다하여 제작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양감은 절제하고 묘사는 최소화한 브론즈 전신상이다.     

 

또 다른 한 사람 Kristjan Jaak Peterson(1801∼1822)은 농노의 아들로 타르투 대학에 최초로 입학한 인물이며, 에스토니아 언어로 시를 지은 현대 에스토니아 시의 창시자다. 그는 타르투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안타깝게도 21살에 죽었지만 후손들은 그의 생일을 에스토니아 언어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돈이 없어 타르투에서 리가까지 걸어갔다는 일화는 에스토니아에서 꽤 유명한 일화인가 보다. 동상은 건장한 청년이 책 한 권을 끼고 먼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다.

서울의 광화문 광장이라 할 수 있는 탈린 비루게이트 부근 공원에서 본 동상도 나라를 구한 장군이나 왕도 아닌, 작가인 안톤 탐사레였Anton H. Tammsaare(1878 ~ 1940)였다. 그밖에도 대로나 또는 공원에 있는 동상 중에는 시인이나 문학가들이 많았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아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도 많은 부분 우리의 한글에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에스토니아인들도 그들의 말과 언어를 지키기 위해 몇 백 년 동안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질긴 끈은 그들의 언어였으며 그들의 일상이 된 노래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Jaan Tönisson, 정치가이자 저널리스트 /Kristjan Jaak Peterson, 에스토니아 시인
Nikolay Pirogov

니콜라이 피로고프Nikolay Pirogov(1810–1881)는 러시아 사람으로 타르투 대학에서 교수로 5년간 재직했다고 한다. 그는 세균에 의해 괴저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전쟁이 생활이었던 시절에 그는 야전에서의 깨끗한 수술장비와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스트루베 측지 아크Struve Geodetic Arc    

 

타르투 천문대는 측지학자인 Friedrich Georg Wilhelm Struve(1793-1864)가 1818년에서 1839년까지 21년 동안 근무했던 곳이다. 그는 독일 태생으로 타르투대학에서 공부했다. 1813년 도르파트(지금의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알렉산드르 1세는 전쟁 이후 바뀐 지도에서 정확한 국경선을 원했다. 당시에는 지구의 둘레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 1세에게 스트루베의 측지학 아크 프로젝트는 꼭 필요했다. 어쨌든 전쟁은 많은 분야를 발전시킨다. 그와 동료들은 자오선을 지나가는 측지학 아크(연속된 점)를 1816년부터 1855년까지 만들었는데 2820km였다. 그가 평생을 바친 프로젝트였다. 그것은 타르투를 중심으로 하여 258개의 주요 삼각형과 265개의 거점으로 구성되었다. 아크를 만들 당시에는 노르웨이와 스웬덴, 러시아 땅이었지만 현재는 노르웨이 함메르페스트부터 시작해서 우크라이나의 흑해 연안까지 10개국을 지나간다. 자오선의 일부를 처음으로 삼각측량을 이용해 측정하여 지구의 정확한 크기와 모양을 알아냈다. 이 프로젝트는 측지학과 지형학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 이처럼 서로 다른 나라의 과학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성공한 경우는 흔치 않다. 남아있는 측지 거점 표식은 세계유산이 되었다. 자오선meridian이란 북극에서 남극까지 그은 임의의 선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자오선 중에 기준으로 삼은 것이 본초자오선이다. 본초자오선을 360개로 쪼개 놓은 것이 경도이다.     

 

스트루베 측지 아크(왼쪽)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그가 근무했던 타르투 천문대


Tartu Cathedral  

   

규모가 엄청난 건물의 폐허가 Toomemägi 언덕 위에 서 있다. 기대하지 못했던 성당의 잔해였다. 언덕은 독일기사단이 침략하기 이전에 있었던 에스토니아인의 가장 큰 요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1224년 에스토니안 요새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독일기사단에 의해 13세기 이후 가톨릭이 전파되었지만, 가톨릭은 지배자의 종교였으며, 당연히 교회는 독일인들이 사는 지역에 있었다. 그런 이유로 원주민인 발트인들은 가톨릭에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13세기부터 세워진 타르투 성당은 베드로와 바울에게 헌정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지배계층인 독일인 기사단과, 부유한 한자hansa 상인들이 살았던 마을의 중심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1525년 교회는 파괴되었고 이어진 역사와 주민들의 무관심은 이곳의 폐허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17세기 스웨덴 통치 시절에는 지배층으로 이미 동화된 발트 독일인들을 위한 대학이 설립되었다.

건물의 중심인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뼈대는 다 드러나 있는데 기둥을 이어주는 뾰족한 아치가 균형을 이룬다. 겉모습은 육중한데 반해 내부는 경쾌한 편이다. 초기 교회의 형식인 바실리카 양식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당시 프랑스 북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 고딕 양식의 흔적들이 현저하다. 가는 기둥뾰족한 아치, 고딕 양식에서 나타나는 부벽의 모습을 닮은 측랑 등이 그것다. 교회의 머리 부분은 타르투 대학 본관을 건축한 Johann Wilhelm Krause(1757 ~ 1828)에 의해 1804년에서 1807년 사이에 3층 건물로 만들어 당시 대학도서관으로 사용했다. 현재는 19세기 건물로 복원된 ‘타르투 대학 역사박물관’으로 사용 중이었다. 복원과 폐허 사이에는 많은 시시비비가 있다. 내게는 폐허, 그 자체를 만나는 것도 행운이다.


Tartu Cathedral
대학 역사 박물관, 교회의 머리 부분은 19세기식 건물로 변형되었다.
중앙공원의 '아버지와 아들', 윌로 운Ülo Õun(1940~1988)


이전 03화 “습지는 엎어 놓은 그릇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