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평지인 에스토니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연은 숲과 호수, 그리고 습지이다. 하늘을 찌르는 침엽수림으로 숲은 빽빽하여 어둠이 늘 도사리고 있어 숲으로 들어가면 뭔가 나타날 것 같은, 그래서 허겁지겁 쫓기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어둡고 음침한 북유럽 신화에 주로 등장하는 숲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기회다. 현지 투어(라헤마 국립공원)를 알아보니 비루 습지 외에 폭포와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는데 점심까지 포함해서 하루 꽉 차게 운영한다. 하루 종일 따라다닐 생각을 하니 자신이 없다. 그래도 가고는 싶어 시간을 알아보니 인원 모집이 되지 않았단다. 비루 습지는 라헤마 국립공원의 핵심이다. 호텔 옆 버스터미널에서 나르바 가는 고속버스 노선을 보니 비루 습지가 있는 지역에서 정차한다.
라헤마 국립공원 안에 있는 비루 습지(viru Bog, Viru raba)는 탈린에서 동쪽으로 약 70km를 가야 한다. 탈린 버스터미널에서 한 시간 이상 버스를 탔나 보다. 비루 보그와 가장 가까운 Loksa Tee 정류장에 내렸다. 덩그러니 우리만 내렸다. 탈린과 거리가 있어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패키지를 이용하거나 승용차로 방문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중앙에서 차를 돌리는 차선이 나있고 건너편 위쪽으로 Liiapeksi라고 쓴 큰 이정표가 보였다. 위험천만하게도 도로를 건너는 건널목이 없다. 쏜살같이 달리는 차를 피해 재빨리 길을 건넜다. 화살표가 엄청 큰 것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는 뜻이다. 위쪽으로 2분 정도 올라가 Liiapeksi(지역 이름) 화살표를 따라갔다. 2차선의 거친 포장도로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10여분 걸어 들어가 Viru raba(bog)에 도착했다. 발틱 해는 라헤마 국립공원에 있는 4개의 만을 따라 흐른다. ‘라헤마’Lahemaa는 ‘만의 땅’land of bays이라는 뜻으로 비루 습지는 발틱해와 내륙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다.
붉은 곳이 비루 습지가 있는 Loksa 지역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비루 습지에 대한 안내가 즐비한데
“Bog is a bowl turned upside down” 이라고 쓰여 있는 문구가 노랫말처럼 콕 들어와 박힌다. “습지는 엎어 놓은 그릇이야” 그리고 “넌 엎어놓은 그릇 옆에 지금 서 있는 거야”라고 옆에 토를 달아놨다. “엎어 놓은 그릇에 웅덩이가 생기려면 수 천년은 걸리지”.
그리고는 습지의 생성과정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bowl을 엎어놓은 모양이다. 습지의 첫 단계
입구에는 화장실이 있고 안에 있는 시설물은 트레일 로드와 나무 전망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트레일 로드가 워낙 넓어서 다른 쪽으로 접어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약 8,000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습지는 에스토니아인들에게는 생활이었다. 숲으로 들어갈 때는 안개가 자욱한 숲이나 늪지에서 길을 잃거나 수렁에 빠지거나 하는 일이 허다했으므로 숲에서는 무서운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해 내려왔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놀다가 변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은 숲이나 늪에서 부정적이고 음험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습지에 사는 진달래과의 꽃인 래브라도테labradortea는 아주 강한 향을 발산하는데 사람이 맡으면 머리가 아파온다고 한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쓰러지는 일은 놀란 가슴 때문이 아니라 꽃에서 뿜어내는 에테르에 혼미해진 까닭이다. 그래서 에스토니아인들은 뭔가 일이 잘못되가나 나쁜 일이 생기면 “수렁에 빠졌네!” 하고 표현한다. 이들에게 나쁜 일은 곧 늪이나 수렁에 빠지는 일이었으니 숲과 늪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비루 보그의 숲, 나무 아래에는 로즈마리와 빌베리 나무들이 덤불처럼 엉켜있다.
나무로 된 트레일 로드를 걷다가 발 하나를 땅에 내디뎌보니 땅이 쑤욱 내려간다. 전체가 이끼로 무장한 이탄층인 것이다. 이탄층은 90퍼센트 이상이 물이다. 바다와 연결이 되어 있어도 물이 저장이 되는 이유는 이탄층에서는 배수가 아주 느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늪은 천연 저수지다.
이곳에서는 유기물의 분해 과정이 늦어져 썩지 않은 고대 식물이나 생물 등은 물론 유물까지 습지의 깊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이탄층을 알고 보니 신기했다. 나무들이 빽빽한 숲에는 대부분 스코틀랜드 소나무와 노르웨이 가문비나무가 자라고 있다. 키가 큰 소나무 아래에 자라는 키가 작은 반짝이는 식물들은 거의 빌베리Bilberries(야생 블루베리)이다. 하지만 관목들이 수북한 덤불처럼 엉켜 자라고 있어서 내 눈에는 보랏빛 꽃이 수없이 달려있는 로즈마리만 보인다. 초입의 안내문에는 야생 크랜베리도 많이 있다고 나와있는데 확인할 길이 없다. 절대 트레일 로드를 벗어날 수 없으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수없이 반짝거리는 빛은 습지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다. 안내문에는 토양에 따라 나무의 분포도 다르다고 나와있다. 스코틀랜드 소나무는 별다른 영양소가 없어도 햇빛만 충분하면 잘 자라며, 그에 비해 노르웨이 가문비나무는 토양이 좋고 촉촉해야 잘 자란다고 한다. 가문비나무는 반듯하며 참 잘 생겼다. 무주 덕유산 자락에도 가문비나무 숲이 있다.
Bog Rosemary와 Thin Cranberry
트레일 로드를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늘의 구름이 웅덩이 안으로 퐁당퐁당 제집처럼 들어와 있다. 어떤 것은 하트 모양도 있고 방죽이라고 할 만한 크기의 웅덩이도 있다. 한여름엔 한시적으로 수영도 할 수 있는 웅덩이가 있다고 한다. 습지가 만들어지면서 생긴 작은 구멍이 산소가 풍부해지고 분해가 가속화되면서 큰 웅덩이로 변하는데 이 과정은 수천 년이 걸린다. 내 옆에 있는 신비로운 웅덩이들은 수천 년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pool들이다. 진한 웅덩이 색을 보면 겁이 날 정도로 엄청 깊어 보이지만 2m 미만의 웅덩이들이 많고 가장 깊은 것은 약 3 ~ 4m라고 한다. 진한 남색 빛을 띠거나 가장자리에 갈색빛을 띤 웅덩이들도 많다. 붉은 갈색은 인산 때문인데 이것은 유기체의 성장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한다. 인산이 진한 어떤 웅덩이는 하늘의 푸른빛이 더해져 보랏빛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망대까지 입구에서 35분 정도 걸렸다. 유일한 설치물인 전망대에 올라가면 끝이 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비루 보그’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넓어서 인적을 느낄 수 없었는데 전망대에 오니 사람들이 모여있다. 삼삼오오 가져온 간식을 먹으면서 화기애애하다. 대충 남은 먹을거리를 싸가지고 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꿀맛이다.
전망대
1시 10분 입구로 회귀했으니 약 2시간 30분이면 습지 탐방은 넉넉하다. 오긴 왔는데 돌아가는 길이 막막했다. 정류장에서 시간표를 보고 기다리는데 시간표는 시간표일 뿐 탈린행 버스는 한 대도 없다. 사람이 없으니 운행을 안 하나보다. “30분 이상은 못 기다리지”, 하면서 히치하이킹이라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나르바에서 출발한 고속버스 한 대가 격하게 흔드는 손을 보고 정차해준다. 요금이 살짝 더 비싸지만 서준 것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