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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Oct 29. 2022

피와 고통, 침묵과 인내로 새겨진 나이테

# 에스토니아  - 탈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탈린으로   

  

핀란드만 안쪽에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서 핀란드만 남동쪽 입구에 가까운 발트해의 도시 에스토니아 탈린Tallinn으로 간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에 얀덱스 어플로 부른 택시는 운하에 접한 숙소 앞에 정확하게 나타난다. 새벽이어서 택시가 없으면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유럽의 도로를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것은 쉽지 않다. embankment 운하 다리를 건너니 탈린으로 가는 국제 버스터미널 Avtovokzal이 나온다. 예약한 탈린행 에코라인 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니 핀란드 헬싱키행 버스에 사람들이 탑승하고 있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헬싱키로 이동해서 스칸디나비아 3국을 갈 것이냐, 탈린으로 이동해서 발트 여행을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버스 터미널에서 / 헬싱키행 버스


6시 30분에 출발한 에코라인 버스는 러시아 국경도시 Ivangorod에  9시경 도착했다. 출입국관리를 까다롭게 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역시 버스에 실은 수하물 짐까지 전부 내려 검사한다. 경험상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국경 출입국관리소는 일반적인 국가들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소요된다. 강을 건너 EU의 관문인 에스토니아 Narva 출입국관리소에서 러시아인들을 무척 꼼꼼하게 체크한다. 긴장감이 생기는 나라의 국경 출입국 수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문신이 유난하거나 하는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외모가 중요하다. 얼핏 보니 러시아인 한두 사람은 EU 입국을 거부당했는지 침울하다. 국경도시 나르바는 에스토니아에서 탈린, 타르투 다음으로 큰 도시로 나르바는 러시아인 주민의 비율(80%)이  에스토니아인보다 훨씬 높다. 여행 노선을 짤 때 하루쯤 머물까 잠시 망설였던 곳이다. 나르바는 대북방 전쟁 초기 1700년 11월 8,000명의 칼 12세의 스웨덴 군( 대부분 에스토니아인으로 이루어진)이 약 4만 명의 러시아군을 격파한 곳이며(당시 스웨덴의 식민지였다), 지정학상 2차 세계대전까지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두 나라 국경에서만 수속이 약 1시간 이상 걸렸다. 


     

잊힌 여행의 방식 ‘론니플래닛’   

  

나르바에서 탈린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주변의 벌판에는 인가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들판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짚가리들만이 사람이 다녀간 흔적을 알려준다. 침엽수림으로 이루어진 길게 이어진 짙은 숲을 지나면 탈린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탈린까지는 약 320km 떨어져 있으며 국경에서의 출국과 입국 절차를 포함하여 6시간 30분이 걸렸다. 꽤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지루한 것을 모르고 탈린 버스터미널 Tallinna Bussijaam에 도착했다. 오후 1시, 터미널 매점에서 러시아 유심을 빼고 에스토니아 유심을 구입했다. 에스토니아를 떠날 때까지는 안심이다. 언제인가부터 유심에 기대서 여행을 한다. 러시아에서는 얀덱스를, 중국에서는 바이두를, 그 외의 나라에서는 구글이 있어야만 길을 찾아가고,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탈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론니 플래닛’ 책자를 사거나, 론니 플래닛 홈페이지에서 지도를 다운받아 다녔는데, 어느새 그 모든 것이 잊히고 여행의 방식은 바뀌었다. 나도 모르게 남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시스템에 같이 흘러간다. 이제 더 이상 푸른색 론니플래닛 책은 쌓이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는 책장의 그 자리를 비워야 할 판이다.  

    

에스토니아  

   

지정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발트해는 러시아와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로 둘러싸인 북유럽의 지중해이다. 이 바다를 중심으로 에스토니아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웃 나라들로 인해 오랜 시간 잊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주변(현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의 바이킹에게 수시로 노략질을 당했지만 발트인들에게 더 큰 재앙은 12세기 말에서 13세기경 시작된 독일(검의 기사단, 튜턴 기사단) 기사단의 침략이었다. 양손에 검과 성경을 들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 들이닥친 독일인 상인들은 거주지역을 만들어 거주했으며, 기사단의 고위직은 영주가 되었다. 원주민인 발트인은 이동할 자유가 없는 그들의 농노이자 하인이 되었다. 13세기에 탈린은 한자 동맹에 가입했으며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탈린과 타르투, 라트비아의 리가는 한자 Hansa 동맹의 도시로 급부상하여 번영하였다.    

  

비루 게이트 앞

탈린 구시가지, 비루 Viru 스트릿


탈린 버스 터미널Autobussijaam에서 터덜터덜 캐리어를 끌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멀지 않은 3일간 머물 호텔에 짐을 풀었다. 탈린에서는 버스터미널을 자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이비스센터 앞 정거장에서 구시가지가 있는 비루Viru게이트까지는 트램으로 약 5분 거리이다. Viru가 맥주를 뜻한다고도 하지만, Viru는 오래전 에스토니아 북동부에 있는 부족 국가였던 Virumaa에서 유래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Viru가 붙은 지명이 꽤 있다. 14세기 중반에 건립한 비루게이트는 툼페아Toompea 언덕을 둘러싼 성벽과 연결되어 있으며,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 중의 하나였다. 양쪽에 주황색 고깔을 쓴 두 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비루게이트를 들어가면 탈린이 번영했던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원래 주민들의 거주지였던 곳에 13세기경 덴마크 이민자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는 한마디로 중세 박물관이다. 창문이 작아 비율이 더욱 왜곡돼 보이는 15세기에 지어진 시청사 건물을 지나 구시가지의 골목길로 접어들면, 특히 14, 15세기에 번영했던 Hansa(친구, 동료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독일 뤼베크에서 시작된 상업 동맹 도시) 도시의 분위기가 넘친다. 중세를 상징하는 달그락거리는 갑옷의 기사와 독일인 상인들이 들락거렸던 사무실은 호텔, 레스토랑, 기프트샵, 카페, 박물관, 대사관 등으로 변했다. 성안에는 분홍빛 건물인 에스토니아 의회와 각종 정부 기관까지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이곳은 현재도 여전히 에스토니아의 중심이다.  


비루게이트 근처의 콘서트 홀, 왼쪽은 극장
구 시청사(현재는 박물관)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는 시청사 광장
비루 스트릿
골목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다가 보니 관광객을 태운 차가 골목을 지나다닌다.
가장 번화한 올드 한사 거리
유명한 짧은 다리 길


침략자와 그들의 역사    

 

‘탈린’은 에스토니아어로 ‘덴마크인의 성’이란 뜻이다. 도시의 이름뿐 아니라 탈린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덴마크 왕의 정원’이라거나 ‘뚱뚱한 마가레트 탑’ 같은 덴마크와 관련된 지명이 눈에 뜨인다. 


그동안 발트해 연안을 수시로 노략질하던 바이킹답게 덴마크인들은 발트 땅을 송두리째 차지하고 싶었다. 급기야 1219년에는(스웨덴이나 러시아보다 먼저) 에스토니아를 침략한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6월 15일 린다니제Lyndanise(탈린의 옛 명칭) 전투에서는 에스토니아군과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덴마크군은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전투의 막다른 골목에서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에게 하늘에서 붉은 배경에 흰 십자가 깃발이 나타나니 발데마르 2세는 ‘신이 아직 덴마크를 버리지 않았다’라는 계시라고 생각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싸워 결국은 툼페아 요새에 깃발을 올린다. 이후 발데마르 2세에게 나타난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는 그때부터 ‘국민의 힘’이라는 뜻의 덴마크 국기 Dannebrog가 되었으며 발데마르 2세가 서 있었던 땅은 ‘덴마크 왕의 정원’이 되었다. 오로라나 빛 번짐처럼,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지구 북방 하늘에 자주 나타나는 대기현상이었거나, 그 순간 누군가가 깃발을 휘날리며 나타날 수도 있었겠다. 이날부터 사용한 덴마크 국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기라고 한다. 국기에 그려진 왼쪽으로 치우친 십자가를 노르딕 십자가라고 부르는데 바이킹에 기원을 둔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은 색깔만 다를 뿐 덴마크 국기를 본떠 노르딕 십자가를 국기에 사용한다. 


덴마크는 - 이교도를 개종하겠다는 명분으로 1199년 이미 라트비아 땅에 들어와 똬리를 튼 - 브레멘 교구장 알베르Albert von Buxhoeved 대주교가 만든 ‘검의 형제 기사단(리보니아 기사단)’에 밀려 라트비아 쪽으로는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에스토니아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약 127년간 에스토니아 땅을 점령한 덴마크는 1346년 그들의 점령지를 헐값(은 약 4.5톤)으로 독일 기사단에 매각하였다. 에스토니아는 이후 약 215년간 독일 기사단에(독일인들은 이 땅을 ‘리브란트’라고 불렀다), 149년 동안은 스웨덴, 208년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1918년이 되어서야 최초로 독립국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2년 후 1940년 다시 소련에 병합되었으며, 독일군이 점령했던 2차 세계 대전 때(1941년에서 44년)를 제외하고 1991년 독립할 때까지 강압적인 소련(러시아)의 통치는 계속되었다. 소련의 강제 병합 시기에 수만의 에스토니아인들은 의도적으로 강제 추방되거나 투옥되었으며 그 빈자리는 러시아인들로 채웠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탈린은 인구의 절반 가까이, 나르바 같은 국경 도시에서 러시아인의 비율은 80% 이상이다. 이처럼 대규모 인구를 이주시키는 방식은 스탈린이 즐겨 사용했던 정책으로, 민족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성벽 안이 '덴마크 왕의 정원'이다.


에스토니아를 여행하고 공부하면서, 36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던 나라의 후예로서 이들의 역사를 간과할 수가 없었다. 피와 고통, 침묵과 인내로 새겨진 에스토니아의 나이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에스토니아인은 세계에서도 무신론자가 가장 많기로 유명하다. 긴 세월에 걸쳐 종교를 앞세워 들어온 외세의 영향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코투오차 전망대에서 구시가지를 바라보면, 시대를 달리하며 세워진 특별한 교회들이 눈길을 끈다. 올라프 교회(St. Olavs Church)의 고색창연한 첨탑이 형형하다. 교회의 높은 첨탑은 종교적 목적보다도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세워졌다. 첨탑은 항해의 안전을 위한 등대 역할을 하였다. 12세기에 처음 세워진 교회는 노르웨이의 왕인 '올라프 2세(1015~1028 재위)'에게 헌정되었다. 중건을 반복하다가 15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공으로 성인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뱃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는 노르웨이 바이킹으로 영국에 정착해 살면서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를 보좌했던 사람이다. 애설레드 2세가 영국에서 정착민으로 살아가던 바이킹족(데인족)을 학살한 성 브릭티우스 축일(1002년 11월 13일, 금요일)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고국의 기독교 선교에 앞장섰던 왕이다. 그 과정에서 인명 살상은 물론 강압과 폭력을 사용해 노르웨이인들을 개종시켰던 사람인데 성인이라니,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역시 그였다. 그렇다면 정치와 하나 된 종교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가장 현명한 수단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바이킹 발할라’에서 올라프 2세는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는 이복동생인 ‘하랄드 시구르손’을 제치고 야망을 이룬다. 


성 니콜라스 교회는 ‘산타클로스’로 알려진 Saint Nicholas(270~341) 에게 헌정된 교회이다. 13세기에 세운 교회는 지금은 박물관과 콘서트 홀로 사용한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성 니콜라스는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 파타라에서 살았던 실존인물이며 가난한 자와 어린이, 어부와 선원의 수호성인이다. 대부분 어부와 선원, 상인들이 살았던 탈린에서 성 니콜라스 교회는 이름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청사광장에서 해마다 열리는 탈린의 상징인 오랜 역사를 간직한 크리스마스 마켓도 성 니콜라스 교회와 관련이 있어 보였다.   

   

코투오차 전망대에서 바라 본 한창 보수중인 올라프 교회, 바다가 지척이다. 
거리에서 본 올라프 교회, 높을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균형감이 뛰어나다.
성 니콜라스 교회, 코투오차 전망대에서 


코투오차 전망대 가는 길에 만나는 알렉산드로 네프스키 성당은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1900년 러시아 치하에 세워졌다. 날렵한 탑 들 사이에 들어앉아 있는 아름답거나 장엄해 보이기보다는 둔중해 보이는 교회는 이곳에서 왠지 낯설다.

러시아 지배의 상징, 알렉산드로 네브스키 정교회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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