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화창한 일요일이다. 시굴다는 리가에서 53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기차나 버스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이다. 가우야 Gauja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전형적인 전원도시이며 라트비아에서는 보기 드문 산악도시이다. 평야가 대부분인 라트비아에서 이 지역은 언덕과 산이 많아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13세기에 세운 성이 네 개나 남아있다. 시굴다 성을 보고 투라이다 성까지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올 때는 셔틀버스를 타고 오겠다는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말이다.
리가에서 9시에 출발하는 기차 내부는 알록달록 레이서 복장에 바이크를 가지고 탄 사람들로 만석이다. 일상적으로 열리는 바이크 대회를 시굴다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시굴다역에서 내리는 자전거 행렬에 덩달아 즐거웠다. 기차역에서 시굴다 성(리보니안 성)까지는 걸어서 약 40분에서 50분이면 도착한다. 가는 길에는 소박해 보여서 더 아름다운 루터교 교회 Sigulda Evangelical Lutheran Church와 뉴 시굴다 성도 볼 수 있다. 공원의 테니스장을 지나면서는 라트비아 테니스 선수인 Jeļena Ostapenko의 사진을 만났다. 반가웠다. 정교하지는 않지만 힘과 패기가 넘치는 오스타뼁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2017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했다.
시굴다행 기차/ 시굴다 기차역
Jeļena Ostapenko/ Sigulda Evangelical Lutheran Church
시굴다 성과 투라이다 성
시굴다 성은 120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 세웠다. 크기가 다양한 돌을 쌓아 올린 성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성이다. 웅장한 성의 주변으로는 도시가 만들어졌다. 시굴다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이 땅을 소유하려는 주변국가-독일기사단,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들의 끊임없는 싸움은 많은 것을 파괴시켰다. 성의 남쪽과 북쪽의 타워를 제외한 부분은 거의 파괴되었다. 성의 안뜰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북쪽 타워에 올라가면 가우야 강줄기 뒤쪽으로 멀리 붉은색 투라이다 성이 보인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투라이다 성이 너무 멀리 보였기 때문이다. 나가는 길에 시굴다 성 매표소에서 오늘 열리는 바이크 행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거리를 지나는 차량은 한 대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표원에 의하면 오늘 하루 차량 통행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수 없다. 걷는 구간도 통행이 금지된 구간이 많다고 했다. 내가 만난 바이크 행렬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라트비아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참가하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투라이다 성까지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큰길은 폐쇄되었으며 입구에서 성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낯선 지역에서 물리적인 거리는 숫자일 뿐이다. 투라이다 성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낭패였다. 어쩌면 시굴다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산길은 우리나라의 평범한 뒷산 정도의 길이지만 울창한 삼림은 햇빛이 들어올 틈이 없다. 라트비아에서 가장 큰 강인 가우야 강의 이정표만 보면서 걸었다. 엄청난 크기의 버섯과 예쁜 꽃들을 들여다볼 틈이 없이 속도를 내었다. 시굴다와 국립공원 전체가 레이서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 붉은색 가우야 강을 지나고 국립공원 안에 있는 바이크 레이싱 대회의 시작점에서는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시굴다 성(리보니아 성)
시굴다 성을 끼고 걷는 트레킹 루트
가우야 강/ 바이크 레이스의 시작점
Krimulda와 Turaida의 이정표가 나오면 투라이다 성에 거의 다 온 것이다. 투라이다 성에 12시 30분경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니 한글로 된 팸플릿을 내어준다. 성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넓은 조각공원이 있으며 투라이다의 장미라고 알려진 마이야의 묘비도 만날 수 있다.
투라이다는 리브인의 언어로 ‘신들의 정원’ 이란 뜻이다. 성은 1214년 앨버트 대주교의 거처로 지어졌으며 330여 년에 걸쳐 계속 건축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파괴된 성은 20세기 중반에 복원을 시작하였다. 너무 멋진 성을 보는 순간, 잘 왔다는 생각에 걸어오면서 생긴 불안감이 한순간에 없어졌다. 입구에서부터 성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고딕양식의 탑과 주 건물의 비례가 잘 어울린다. 전반적으로 돌과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다. 내부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며 성 밖에는 난방을 위한 굴뚝이 설계되어 있다. 타워에 올라가면 끝이 없는 가우야 국립공원의 울창한 숲을 볼 수 있다. 라트비야에서 제일 긴 강인 가우야가 삼림 한가운데를 굽이치며 흐른다.
투라이다 성 입구
투라이다 성
타워에서 내려다 본 투라이다 성
성 앞에는 작은 박물관과 1750년에 세운 예쁜 목조 교회가 서 있다. 교회 종탑은 특이하게도 바로크 양식이다. 밝은 파스텔톤을 한 교회 내부는 단순하고 소박하다. 투라이다 성에서 1시간 20여분을 소비했다. 혹시나 해서 셔틀버스가 있는 주차장에 가보니 역시 운행을 안 한다. 신발끈을 고쳐 매고 길을 재촉했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공간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알록달록한 레이서들과 우리 둘 뿐이다. 길가에 바짝 붙어 걸어도 레이서들에게는 방해가 되는 것이 느껴졌다. 행사를 알았더라면 일정을 바꿨을 것이다. 기차역에서 레이서들 외에는 매표를 안 했어야 했다.
레이서들이 가우야 강을 건너자 정장을 갖춘 연주단이 연주를 한다. 뜻밖의 광경이 신선했다. 연주단은 레이서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한참을 연주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삼삼오오 길 가에서 응원을 한다. 공원에는 시굴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있는 것 같다. 피니시 지점에는 축제 분위기로 인산인해다. 인파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레이싱 선수들은 리가로 가는 기차를 탈것이다. 우리는 이들보다 먼저 기차역으로 달려야만 했다.
레이서를 반기는 연주/ 피니시 지점에서 레이서들을 기다리는 주민들
체시스 성
시굴다를 다녀온 다음날 체시스를 다녀왔다. 시굴다와 체시스는 같은 방향이지만 하루에 두 곳을 다녀오는 것은 쉽지 않다. 볼 것이 많은 시굴다에서 시간을 많이 뺏기기 때문이다. 체시스는 리가에서 북동쪽으로 약 9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리가에서 기차나 버스를 타면 2시간 가까이 걸린다. 둥근 광장의 전승기념비에서 우회전하여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오른쪽에는 복원 중인 성 요한 교회(1283)가 있다. 그 앞에는 제법 나이를 먹은 듯한 빛바랜 목조주택이 아름답다.
전승기념비가 있는 광장/ 체시스 성이 있는 마을
덧창이 있는 목조 주택
기차역에서 약 900미터, 골목의 끝에 체시스 성이 있다. 라트비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 중 하나인 Cēsis Castle(1214년 경) 은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이 세웠다. 투박한 두께를 한 성의 벽체 위에는 주황색 둥근 고깔 모양의 지붕이 얹어있다. 성으로 들어갈 때는 해자에 걸린 다리를 건너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전형적인 중세 성의 모습이다. 전통 의상을 입은 아주머니는 관람객이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촛불이 일렁이는 등을 하나씩 건네준다. 독일인 십자군이 만든 성안에서 짧지 않은 그들의 아픈 역사 이야기를 보고 나왔다. 중간에 나올 수도 있었지만 담담하게 들려주는 그들의 조상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해자가 보이는 체시스 성
독일계인 알베르트 주교가 창설한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은 3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4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될 무렵인 13세기 초 리보니아(현재 라트비아의 동북부 지역과 에스토니아 남부)를 무력으로 정복했다. 13세기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이교도가 사는 땅이었던 발트는 독일계 북방 십자군(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튜턴 기사단)에 의해 점령당하고 개종되었다. 라트갈레인과 리브인들이 살고 있던 리보니아를 정복한 독일 기사단(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튜턴 기사단)은 도시를 만들고 성과 요새를 세웠다. 종교를 앞세워 무력으로 리가 지역을 정복한 발트계 독일인들은 그 땅을 리브란드라고 불렀다. 평화로웠던 땅은 독일인들(19세기까지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 형성되지 않았다.)의 식민지가 되었다. 발트해 무역로의 거점을 독점한 독일계 상인들이 건설한 리가를 비롯한 발트의 도시들은 부유해졌으며 13세기에서 15세기에는 한자동맹의 중심도시로 도약했다. 그들은 귀족이 되었으며 라트비아 인들은 그들의 농노로 수백 년간 학정에 시달렸다. 원주민은 도시에 살거나, 돌집을 짓거나, 길드에서 활동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잔인한 통치와 자신들의 영지 확보에 더 열중했던 리보니아 기사단은 1237년 교황의 명령으로 잠시 와해되었다가 1561년 해체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체시스는 튜턴 기사단 Teutonic Order의 소유가 된 후 더욱 번영하였다. 체시스에는 튜턴 기사단의 중요한 공관과 조폐국 등이 있었으며 기사단의 단장은 체시스에 거주했다. 체시스는 프로이센에 뿌리를 두고 있던 튜턴 기사단의 중심지 중 한 곳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