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부탁해서 받은 런치박스를 들고 새벽같이 호텔문을 나섰다. 리가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낯선 다른 세상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라트비아 리가를 떠나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로 간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이른 새벽이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이 어깨에 살풋 올라와 앉아있다. 6시에 출발한 Ecolines버스는 리가 국제공항에 한 번 정차한 후 옐가바를 지나 국경을 향해 달린다. 리가에서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까지는 약 5시간이 소요됐다. 클라이페다 Klaipeda는 리투아니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며 유일한 항구 도시이다. 하지만 항구도시 특유의 거친 활기는 어디에도 없다. 에스토니아나 라트비아가 가지고 있는 해양국가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기차역에서 가까운 호텔에 들어가니 이른 시간이건만 방을 내어준다.
팔랑가, 비루트의 숲
팔랑가 마을/ 팔랑가 거리에서
클라이페다 버스터미널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팔랑가 Palanga로 향했다. 팔랑가는 클라이페다에서 26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버스를 타고 창밖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도착한다. 길가에 도열한 목조로 된 주택들이 동화 속 마을을 연상시킨다. 여름날의 행복했던 여운 때문인가, 뜨거운 여름이 가고 놀이기구는 멈췄지만 거리는 여전히 부산하다. 팔랑가는 작은 마을이지만 리투아니아 서부 최고의 휴양도시답게 공항도 있다. 팔랑가의 중심인 보타니컬 가든 Palangos miesto botanikos parkas을 찾았다. 식물원의 깊은 숲은 햇빛이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녹음이 짙다. 오리들은 연못에서 푸드덕 거리며 목욕을 하거나 고목나무 옆에서 삼삼오오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고요함이 깊어지니 새소리는 더욱 또렷하다.
The palace's northern facade
southern facade and the rose garden
식물원 내에는 호박琥珀 박물관 Palanga Amber Museum이 있다. 박물관은 1897년 건축가 Franz Schwechten이 설계한 티슈키에비츠Feliks Tyskiewicz 백작의 집이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기본으로 신고전주의와 바로크 스타일을 절충하였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저택은 파괴되고 방치되었다. 가문의 상속자인 Alfred Tyszkiewicz(1913~2008)는 팔랑가 시에 그의 저택을 기부했다. 1963년 문을 연 호박 박물관에는 각종 곤충 및 식물이 들어있는 작품들을 포함하여 약 28,000 개의 호박이 소장되어 있으며 그중 약 4,500 개의 호박이 전시되어 있다.
amber
옛사람들은 호박은 태양이 흘리는 땀이거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처럼 떨어진 보석이라고 생각했다. 황금색 호박은 액운을 막아주거나 통증을 줄여준다고 믿었다. 로마시대에 와서야 나무의 수액으로 탄생한 보석임이 밝혀졌다.
호박의 영어 이름인 엠버 amber는 고대 프랑스어 ambre(호박)의 영향을 받은 아랍어의 용연향을 뜻하는 안바르 anbar에서 나왔다. 호박 amber은 소나무를 비롯한 침엽수의 송진이 수천만 년 동안 땅속에 묻혀 화석화된 물질이다. 나무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굳어버린 송진은 많은 비가 오거나 홍수가 나면 바닷가로 쓸려 내려간다. 깊은 땅속에 묻혀있던 송진 덩어리는 지층의 침식과 융기 작용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호박은 탁하거나 투명한 노란색을 띠며 붉거나 흰색에 가까운 종류도 있다. 박물관에는 먼 옛날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내릴 때 갇혀버린 수천만 년 전의 곤충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새삼스럽지만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 탄생의 단초는 호박에 갇힌 모기의 뱃속에 있던 공룡의 혈액이었다.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보석 중의 하나인 호박은 발트 연안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 덴마크 등에서 전 세계의 90퍼센트를 생산한다. 그중에서도 팔랑가는 가까운 칼리닌그라드 Kaliningrad와 더불어 대표적인 호박 생산지이다.
선사시대부터 발트의 해안에서 출발한 호박은 ‘북방의 금’이라고 여겨질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호박은 동물 모피, 꿀 등과 함께 북쪽으로는 핀란드만, 동쪽으로는 북해, 남쪽으로는 강을 이용하여 흑해와 로마, 그리스와 이집트, 시리아까지 운반되었다. 투탕카멘 Tutankhamen (재위 기원전 1332~1323)의 무덤에서 발트산 호박구슬이 발굴됐으며, 델포이 아폴로 신전의 제물로도 보내졌다. 발트산 호박은 적어도 기원전 16 세기부터 지중해까지 이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오래된 무역로를 현대인들은 엠버로드라고 부른다. 예나 지금이나 발트에는 소나무 숲이 많다.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수액/ 바닷가에서 호박을 채취하는 주민들과 가공하지 않은 호박조각
호박을 채취하는 장면을 그린 일러스트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림에서 사람들은 얕은 바다나 해안에서 호박을 줍거나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듯이 호박을 뜰채로 건져 올리고 있다. 발트의 바닷가를 거닐다가 때로는 호박을 줍기도 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호박의 비중이 낮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호박 목걸이를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선물한 사람 마음을 생각해서 한 두 번 착용했을까, 깊이 넣어둔 목걸이를 꺼내 보았다.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호박으로 엮인 목걸이는 깃털만큼 가볍다.
Jūratė 와 Kastytis
호박의 원산지답게 발트와 리투아니아에는 호박과 관련한 전설이 많다. 그중에 유라테 Jūratė 와 카스티티스Kastytis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Jūratė(바다를 상징) 공주는 발트해 바닷속 황금빛이 나는 호박 성에서 살고 있었다. 가끔 뭍으로 놀러 나오곤 했던 유라테는 어느 날 물고기를 잡는 청년 카스티티스를 발견하였다. 카스티티스가 그물을 던질 때마다 그의 배는 만선을 이루었다. 화가 난 유라테는 카스티티스를 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호박 배와 인어들을 이끌고 카스티티스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카스티티스는 정신을 잃고 바다 아래로 끌려 들어갔다. 그러나 카스티티스의 얼굴을 본 순간 그를 벌하고자 유혹했던 유라테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유라테와 카스티티스는 아름다운 호박성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유라테의 아버지 천둥의 신 페르쿠나스 Perkūnas는 한 물고기의 밀고를 받았다. 페르쿠나스는 약혼자를 버리고 한낱 인간을 사랑한 딸 유라테와 카스티티스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페르쿠나스는 벼락과 천둥으로 그녀의 호박궁전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카스티티스도 호박궁전과 함께 유명을 달리했다. 천둥의 신 페르쿠나스의 노여움은 바다를 폭풍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미 산산조각이 난 호박성의 잔해는 뭍으로 밀려 올라왔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폭퐁이 지나간 후 호박이 해안으로 밀려 올라온 것은 천둥 신 페르쿠나스의 노여움 때문이며 유라테가 죽은 연인 카스티티스를 그리워하며 해변에서 흘린 눈물 방울이 호박이 되어 떨어진다고 믿고 있다. 인어이야기와도 흡사한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문학과 발레, 오페라 등에 자주 오르내리는 주제이기도 하다. 팔랑가의 문장은 Jūratė 를 상징하는 은색 관과, 팔랑가의 전통적인 산업인 호박 구슬 문양의 조합이다.
팔랑가의 문장, Jūratė 를 상징하는 은색 관과, 팔랑가의 전통적인 산업인 호박 구슬 문양의 조합이다.
호박 박물관을 둘러싼 넓은 정원은 약 3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처음에 주민들은 신전이 있는 신성한 숲의 나무를 베는 것을 거부했다. 이 숲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사랑한 비루트의 숲이었기 때문이다. 비루트 Birutė(1330~1382)는 리투아니아 대공 케스투티스 Kęstutis( 1297~1382)의 아내이며 리투아니아인들이 존경하는 비타우타스 Vytautas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케스투티스의 아내가 되기 전에 비루트 언덕에 있는 신전에서 불을 돌보는 사제였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비루트를 더욱 사랑했다. 그러므로 비루트가 봉사했던 낮은 언덕과 해변으로 이어진 팔랑가 숲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숲이다. 호박 박물관에서 남서쪽으로 400미터 지점에 나지막한 비루트 언덕이 있다. 이곳은 독일인들로 이루어진 북방십자군(튜턴 기사단)이 리투아니아를 침략하기 전까지 이들이 숭배하던 신을 모시던 신전이 있는 언덕이었다.
호박 박물관에서 북쪽으로 약 10 여분 걸어가면 팔랑고 브리지 Palangos tiltas가 나온다. 아름다운 일몰로 유명한 팔랑고 브리지는 호박박물관과 더불어서 팔랑가의 랜드마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