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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y 01. 2023

유쾌한 소풍, RUNDALE PALACE

# 라트비아 - 룬달레 궁전


라트비아 여행일정을 짜면서 룬달레 방문은 최우선이었다. 당시 러시아 변방이었던 지역에 규모가 큰 아름다운 바로크식 궁전은 의외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설계한 라스트렐리 Francesco Bartolomeo Rastrelli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호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리가 버스터미널에서 오전 9시 출발하는 바우스카행 버스를 탔다. 룬달레궁전이 있는 바우스카까지의 거리는 약 64킬로미터로 1시간 10분가량 남쪽으로 내려간다. 옆에 있는 바우스카 정류장에서 약 12km 거리에 있는 룬달레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면 리가에서 룬달레까지 1시간 40분이면 충분하다. 룬달레필스 정류장에 내리면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한 곳으로 향한다. 궁 옆에는 민가 한 채 오롯이 앉아있는데 서울에서 예약했던 호텔이다. 여행 일정을 조정하면서 출발 한 달 전에 해약을 했지만 말이다. 와서 보니 호젓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멋진 숙소로 보인다.    

  

룬달레 궁전 정류장과 근처에서 유일한 주택( 호텔이다.)


비론 공작의 여름 궁전     


룬달레 궁은 쿠를란드Courland 세미갈리아 공작(통치자)인 비론의 궁전이다. 비론이 룬달레 궁을 짓기 시작할 무렵인 1736년 그는 쿠를란드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러시아 황위를 물려받은 쿠를란드의 안나공작부인을 따라 간 러시아에서 안나 황제의 조력자로 살벌한 통치를 하던 시기였다. 


1737년 경에는 쿠를란드의 통치자였던 케틀러가의 승계가 단절되었다. 쿠를란드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러시아의 안나 황제는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연인 비론을 쿠를란드 세미갈리아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러시아 황권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던 독일인 비론은 쿠를란드 세미갈리아 공작까지 손에 넣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그는 쿠를란드의 수도 옐가바에서 통치자가 되었으며 룬달레 궁은 자연스럽게 쿠를란드 세미갈리아 공작의 여름 궁전이 되었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이 그의 인생이다. 비론은 1740년 안나 황제의 죽음으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당연히 룬달레 궁전의 건축도 중단되었다. 그래도 행운의 여신은 아직 그의 편이었는지 비론은 22년 후 독일인으로 황제가 된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복권이 되었다. 쿠를란드 세미갈리아 공작으로 복귀한 그는 1764년 룬달레 궁전의 공사를 재개하여 1768년 완성하였다. 


룬달레 궁전 입구


러시아식 바로크 양식의 외관을 한 룬달레 궁전의 내부는 우아한 로코코풍으로 꾸몄다. 바로크의 시대가 가고 로코코 양식이 유행할 만큼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섬세하며 경쾌한 치장벽토 장식은 대부분 요한 마이클 그라프의 작업장에서 완성했다. 과하지 않은 간결한 화려함은 단정해 보이기까지 하다. 파스텔 색조의 프레스코화는 이탈리아 화가 Francesco Martini와 Carlo Zucci가 제작하였다. 실내에서 볼 수 있는 로코코풍의 실크 벽지와 프랑스산 가구, 중국 도자기와 네덜란드산 델프트 도자기 등은 18세기 당시의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18세기 유행한 중국풍의 영향이 표현된 가구와 공예품 등을 볼 수 있다. 1762년 복권된 비론은 1772년 죽을 때까지 룬달레 궁전에서 여름을 보냈다. 아들 Peter von Biron(1724~1800)이 Courland 공작을 승계했다. 

     

황금의 방/ 중국풍의 병풍으로 꾸민 방
공작의 침실
네덜란드 델프트 도자기로 장식한 코너/ 서재


1736년에서 1740년, 처음 궁전을 설계하면서 조성한 바로크식 정원은 룬달레에서 꼭 봐야 할 장소이다. 정원은 룬달레 궁전의 백미이다. 룬달레 궁에서 보낸 3시간 중에서 1시간 30분을 정원에서 보냈다. 정원은 룬달레 궁의 입장권을 구입할 때 정원까지 볼 수 있는 티켓을 구입해야 볼 수 있다. 대칭형의 프랑스식 정원을 울창한 장미정원이 감싸고 있으며 그 뒤로는 다양한 형태의 소로와 미로로 연결된 담장을 두른 작은 정원들이 있다. 그곳에는 예쁜 pergolas(포도나 등나무로 덮인 정자)가 많다. 야외극장도 있으며 중국식 정자도 한 채 세워져 있다. 당시 유행하던 중국풍(시누아즈리 chinoiserie)의 영향이다. 작은 뜰은 숲과 연결되어 있다. 많은 방문객이 궁전 내부만 보고 가는 것인지 정원은 한적하다. 장미정원 뒤쪽으로는 그늘도 벤치도 많아서 산책하기 좋은 계절에 방문한다면 잘 꾸며진 정원에서의 시간은 충분히 행복하다. 지나치게 넓고 광활한 베르사유나 차르스코예 셀로에 있는 예카테리나 2세 궁전의 정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집중감 있는 아름다움을 만끽 할 수 있다.   

   

중국풍의 정자 지붕위에 있는 풍향계/ 정원


Anna와 공작   

  

룬달레 궁전의 주인은 Ernst Johann Biron이다. 하지만 Anna가 없었다면 그의 이름이 역사에 기록으로 남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를 존재하게 만든 사람은 러시아 황제 Anna Ivanovna이다.   

Anna Ivanovna(1693~1740)는 러시아 표트르 대제와 공동 통치자였던 이반 5세의 딸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이반 5세는 국가통치능력이 부족했으며 1696년 안나가 3살 때 사망했다. 안나의 어머니 프라스코비아 살티코바는 안나와 언니 캐더린을 비롯한 세 자매를 홀로 키웠으며 안나가 왕족의 소양을 골고루 갖추도록 교육했다. 표트르 대제는 이 가족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시켰다. 국토를 확장시키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표트르 대제에게 결혼 적령기에 있는 이반 5세의 딸들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발트해가 있는 쿠를란드(현재 동부 라트비아)는 러시아에게는 매우 중요한 땅이었다. 17세의 안나는 표트르 대제의 바람대로 쿠를란드 공작인 프레데릭 윌리엄 Frederick William과 러시아에서 결혼했다. 표트르 황제는 조카 안나에게 두툼한 지참금을 주었다. 안나 부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 주를 보내고 쿠를란드공국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나의 남편 윌리엄 공작은 가는 도중 길에서 사망하였다. 남편이 죽었지만 안나는 쿠를란드의 수도 미타우(옐가바)에서 남편 대신 쿠를란드를 약 20년간 통치했다.   

 

안나의 쿠를란드 옐가바 궁정에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출신의 Peter Bestuzhev(1664~1742) 백작이 있었다. 1712 년에서 1728년까지 쿠를란드에 거주한 그는 섭정이었으며 공공연히 안나의 연인이었다. 그는 뜻하지 않았지만 쿠를란드의 섭정에서 물러나고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여동생으로 인해 쿠를란드의 궁정에 발을 들여놓은 비론은 섭정 Peter Bestuzhev 백작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추방시키는 데 성공한다. Ernst Johann Biron의 여동생은 백작의 연인이었다. 옐가바 궁정에서 Biron은 안나 이바노브나에게 영향력 있는 신하이자 연인이 되었다. 1723년 비론과 결혼한 베니그나(1703~1782) 또한 안나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안나와 비론을 공유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730년 표트르 대제의 손자인 표트르 2세(재위 1727~30)가 사망한다. 드미트리 골리친이 이끄는 최고 추밀원은 왕족으로서 남편과 후사도 없고 정치세력도 없는, 변방에 있는 쿠를란드 공작부인 안나 이바노브나를 새 황제로 지목했다. 그리고 안나에게 황제의 권력을 내려놓는 조건을 제시했다. - 결혼은 하지 않으며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는다. 추밀원이 국정운영을 통제하며 군대와 근위대도 추밀원의 관할 아래 둔다. 추밀원의 승인 없이 전쟁을 선포하거나 강화조약을 맺을 수 없다. 세금을 징수하거나 국가기금을 사용하거나 영지의 수여와 몰수를 할 수 없으며 대령 이상의 자리에 임명권을 행사할 수 없다. - 황제의 조건을 수락한 안나는 황위를 이어받았다. 비론부부와 자녀들도 안나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했다. 안나 황제는 추밀원이 제시한 조건을 찢어버리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예전의 절대군주로 군림했다. 안나의 통치 기간에 독일인 비론의 재물은 불어났으며 그의 삶에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 순간이었다. 러시아인들은 이 기간을 ‘독일 멍에’라고 묘사했다.


Ernst Johann Biron과 안나 황제/ 출처 : en.wikipedia.org


러시아에서 최고 권력에 오른 비론 Ernest Johann Biron(~1772)은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는 1735년 쿠를란드 지역 바우스카에 위치한 룬달레의 오래된 중세 성이 있는 장원을 사들였다. 그곳에 1736년 경 자신의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설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을 건축한 이탈리아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 Bartolomeo Rastrelli가 맡았다. 

쿠를란드 옐가바에서는 1730년 통치자였던 안나가 떠난 후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케틀러 공작 가문의 핏줄이 1737년 단절되었다. 러시아 추밀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나 황제는 비론을 쿠를란드와 세미갈리아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비론은 쿠를란드의 공작이 되자 수도인 옐가바 궁전(Jelgavas pils)의 건설도 같이 병행했다. 

1740년 안나 황제가 사망한다. 그녀는 생후 2개월밖에 안된 황제인 이반 6세의 섭정으로 비론을 지목했다. 하지만 그는 섭정의 자리에 오른 지 3주 만에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안나에게 헌신적이었던 비론부부와 가족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22년 후 복권되었다. 안나의 통치기간은 '암흑시대'라고 불릴 만큼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낸 사람들의 숫자가 엄청났다. 따라서 두 연인은, 국가에 손실을 입힌 저속한 유머가 꼬리처럼 전해 내려오는 황제였으며 그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칼날을 휘두르는 독일인 망나니에 다름 아니었다. 안나 황제가 권력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면 두 연인의 관계는 그대로였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안나와 비론은 기록만으로 보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서로를 배신하지 않은 충직한 연인관계를 유지했다.      


파란만장한 룬달레 궁전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에 흡수된 룬달레 궁전을 연인 주보프의 동생 발레리안 주보프 Valerian Zubov에게 선물했다. 발레리안 주보프가 죽자 그의 부인은 슈발로프 Shuvalov 백작과 결혼했다. 슈발로프 가문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군대가 룬달레 궁전에 본부를 둘 때까지 남아 있었다. 룬달레 궁전은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는 군대의 병원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1919년 라트비아 독립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곡물창고로 사용되었고 1972년 룬달레 궁전의 복원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파트와 학교 등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크 건축 양식에  로코코의 장식을 품은 손꼽히는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이는 룬달레 궁전 박물관의 책임을 맡은 라트비아 화가이자 미술 사학자인 Imants Lancmanis(1941~ )의 평생을 바친 노력 때문이었다. 1972년부터 시작한 룬달레 궁전의 광범위한 연구와 복원 작업은 2015년 완료되었다.


프랑스 스타일 정원에서 바라본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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