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이셸 - La Digue
프랄린 섬에서 보트로 약 15분 거리에 라디그 섬이 있다. 섬의 서쪽에 있는 항구는 프랄린에 비해 작고 아담하다. 그래도 항구에 들어서면 여행객이 많이 찾는 섬답게 부산한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라디그의 인구는 이곳에 다 모여있나 보다. 자전거와 전기카트와 여행자들이 섞여서 활기가 넘친다. 섬 안에는 약 25대의 택시와 30여 대의 운송 차량이 있는데 약 2,8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의 생업과 짐을 나르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
Digue(둑 또는 제방)라는 뜻을 가진 섬의 이름은 1768년 고든 장군이 프랄린을 점령할 때 동행한 프랑스 탐험가 Marc-Joseph Marion du Fresne의 함대에 있던 배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789년에는 라디그 섬에 최초의 정착민인 프랑스인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함께 들어왔다. 남쪽의 레위니옹(당시 부르봉 섬)에서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도 이곳으로 추방되었다. 멀리 동인도로 추방될 예정이었던 이들은 선박의 선장에게 뇌물을 주고 친척들이 살고 있는 라디그로 키를 향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당시 동인도행 노예선은 죽음에 이르는 길과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 특별히 라디그의 주민들은 Diguois라고 불린다. 이것은 역경을 이기고 삶의 방향을 바꾼 선조를 둔 표시일 수도 있겠다.
프랑스인들은 섬 주위에 넓게 퍼져있는 산호군락을 이용해 산호 석회를 만들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리석게도 돈만 좇는 시대였다. 이것은 아름다운 라디그의 바다를 황폐화시키는 원인인 되고 말았다. 주민(노예)들이 일군 플랜테이션에서는 코코넛과 바닐라를 재배했으며 코코넛으로는 지방을 추출해서 비누 등을 만들었다. 전형적인 당시의 플랜테이션 모습은 앙수스 다정 비치를 가기 위해 통과하는 유니온 이스테이트 공원에 남아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간 항구 주변의 레스토랑도 같이 바쁘다. 구운 물고기 요리와 카레와 향신료로 버무린 야채가 올라간 크리올 음식이 나왔다. 요리는 숨길 수 없는 그 땅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이미지이다. 다만 음식을 내주는 주인도 먹는 손님도 마음이 바빠 천천히 음미하지 못했다.
항구에는 자전거와 전기카트를 빌리는 곳이 많다. 라디그의 이동수단인 자전거는 며칠 머무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정해진 패턴이 있는 당일 나가야 하는 여행자에게는 짐이 되기도 한다. 앙수스 다정 해변을 가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은 낭만적일 수 있으나 해변은 항구에서 꽤 거리가 있을 뿐 아니라 가는 길이 생각만큼 편안한 길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돌아와 카트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왔던 독일 커플은 어렵게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도착은 했지만 돌아올 때는 자전거를 현지인에게 부탁하고 전기카트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다.
하버에서 유니온 이스테이트 공원까지는 1.8킬로미터이다. 카트를 타고 8분 걸렸다. 공원은 잘 가꾸어놓은 야자나무들이 하늘까지 뻗어있다. 공원이 되기 전에 이곳은 넓게 펼쳐진 바닐라와 코코넛 재배를 위한 플랜테이션이었다. 공원 입구에서 앙수스 다정 비치까지는 약 800미터에 달하는 유니온 이스테이트 L’union Estate 공원을 통과해야 한다.
알다브라황소거북
해변으로 가는 길에는 거대한 화강암 바위아래 살고 있는 귀한 알다브라황소거북을 만날 수 있다. 황소거북은 항상 그늘을 찾아다닌다. 이들은 사람처럼 땀을 흘리거나, 다른 동물들처럼 체온조절을 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이 아예 없다. 그래서 햇빛에 노출이 되어 체온이 올라가면 이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세이셸에서는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알다브라황소거북은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 2급이다.
알다브라황소거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몸집이 큰 황소거북이다. 가장 큰 황소거북은 갈라파고스에 산다. 알다브라황소거북은 원래 인도양에 있는 세이셸과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한 열대 섬에 서식했다. 세이셸의 화강암 섬들에서는 사람들이 살기 훨씬 오래전(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다)부터 황소거북은 살고 있었다. 굵은 다리로 작은 초목들을 짓밟고, 육중한 몸으로 잡목들을 눌러서 육지 거북이 지나간 자리는 코끼리가 지나간 것처럼 길이 만들어졌다. 그 길로 작은 동물들이 지나다녔다. 거북이가 과일을 먹고 싼 똥은 식물들의 발아를 도와 숲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육지 거북은 코끼리거북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16세기부터 인도양에 들어온 포르투갈 인을 비롯한 유럽 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지 먹었다. 특히 네덜란드 인과 프랑스 인들이 모리셔스와 세이셸을 점령한 후부터는 인도양에 사는 황소거북의 개체수는 순식간에 줄어들기 시작했다. 황소거북은 천국 같은 섬에 살다가 지옥 같은 섬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제 섬은 이들의 감옥이 되었다. 100년에서 200년 가까이 사는 거북은 바다거북에 비해 알도 많이 낳지 않는다. 30살 즈음에야 임신이 가능했으므로 무분별한 섭취가 이들의 멸종을 부채질한 것이다.
거북은 초식동물이며 온순해서 잡기도 수월했다. 초기에 유럽 인들은 수만 마리의 거북을 잡아서 소금에 절이거나 기름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거북의 특성을 알고 나서는 함선의 화물칸에 데리고 다녔다. 거북은 먹이나 물을 주지 않아도 몇 개월을 생존할 수 있었으며 양이나 염소처럼 시끄럽지도 않았다. 뒤집어놓으면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겹쳐서 뒤집어놓고 요리할 때마다 사용하면 그뿐이었다. 그러므로 100킬로미터에서 200킬로미터에 육박하는 몸무게를 지닌 거북은 인도양을 횡단하는 선원들에게 가장 신선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순식간에 그렇게 많던 거북은 함선이 지나가는 루트에 있는 섬에서는 눈에 띄는 일이 드물었다. 육지거북은 사람이 사는 인도양의 섬에서 차츰 자취를 감추어갔다.
그러나 함선이 지나다니는 항로에서 제외된 섬으로 홀로 고립된 알다브라 환초(세이셸 제도 남서쪽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세이셸에 속한 곳)에서 육지거북이들이 발견되었다. 멸종위기에 처했다고 생각했던 육지거북이 사람이 찾지 않는 알다브라 환초에서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알다브라거북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세이셸 사람들은 알다브라 섬에서 육지거북을 잡아서 유럽인들에게 되팔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나마 멸종이 되기 전에 제동이 걸렸다. 하마터면 도도새와 코끼리새 등 인도양에 유럽인이 나타난 후 멸종이 되어버린 동물의 리스트에 육지거북의 이름도 오를 뻔했다.
사람들은 멸종위기종인 육지 거북에게 알다브라황소거북 Aldabra tortoises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제는 이 산호초로 이루어진 보잘것없어 보이는 알다브라 섬이 알다브라황소거북의 고향인 셈이다.
유니온 이스테이트를 지나면 프랄린섬의 앙스 라지오만큼 아름다운 앙수스 다정 Anse Source d'Argent 해변이다. 늦은 오후(5시?)에 매표를 하고 들어가면 다음 날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Argent은 ‘은’을 뜻하는 말(돈을 의미하기도 한다)이니 은백색으로 밝게 반짝이는 해변의 이름이다. 아니면 은광상이 이곳에 있었을까?
프랑스 파리 근교에는 아르장퇴유 Argenteuil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이름도 은 광상에서 유래가 되었다. 아름다운 소도시는 모네를 비롯한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세이셸의 비치에서 모네가 그린 아르장퇴유의 다리가 생각나고, 시슬리가 그린 아르장퇴유의 모퉁이를 떠올렸다. 아르장퇴유는 또한 12세기 엘로이즈가 살았던 도시였기에 그녀와 아벨라르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가 떠오른다. 언어가 이어주는 연상작용은 시공을 초월하여 움직이는 것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다. 19세기의 인상파화가들이 살던 시간에서 12세기 엘로이즈가 살았던 중세시대의 아르장퇴유로 순식간에 거슬러 올라갔으니 말이다.
사랑은 두 사람을 파멸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에서 엉뚱하지만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때는 십자군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중세 시절이었다. 특히 프랑스는 기독교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아 십자군 전쟁을 주도했던 당사자들이었다. 중세의 기독교인들에게 2세를 위한 것을 제외하면 남녀의 사랑은 더럽고 추잡한 짓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아벨라르 Pierre Abelard(1079~1142)는 프랑스 서부 낭트 인근 브르타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계적 대학자이며 철학자였다. 엘로이즈 Heloise(1101~1164)는 아벨라르가 재직하던 학교와 관련이 있는 필베르의 조카딸이었다. 필베르는 엘로이즈를 친딸처럼 생각했다. 총명했던 그녀는 언어와 철학, 의학 등의 학문에 뛰어났으며 아름다웠다. 엘로이즈는 필베르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는 대학자 아벨라르에게 엘로이즈를 소개했다. 제자와 스승으로 만난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들의 뜨거운 사랑으로 엘로이즈는 임신까지 하기에 이르렀다.(평민이었다면 돌에 맞아 죽었을 사건이었다) 엘로이즈는 아들을 출산하고 두 사람은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삼촌 필베르는 사람을 시켜 아벨라르를 거세시켰다. 아마도 필베르는 조카딸 엘로이즈를 사랑했었나 보다. 질투에 눈먼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닌가.
결국 두 사람은 이별을 맞이했다. 아벨라르는 생 드니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고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에 있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들의 편지는 사랑과 종교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사랑은 두 사람을 파멸시켰다. 어쩌면 파멸은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던 엘로이즈의 강인한 자의식은 두 사람의 사랑을 이끌었으며 그녀가 빛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아벨라르가 죽은 후 엘로이즈는 그의 시신을 매장한 후에 무덤을 돌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 두 사람의 유해는 마침내 합장되었다.
1817년 조세핀 보나파르트 황후는 이들의 사랑에 감동을 받았는지, 그녀의 명으로 두 사람의 유해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이장되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의 영혼은 하나로 결합했으며, 그들이 헤어져 있을 때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영적인 편지로 보존됐던 사랑이 그들의 육신을 이 무덤 안에 재결합했다.’라고 두 사람의 비문에 새겨져 있다.
이곳은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로 발음하면 다정 해변이다. 몇 번을 되뇌어도 좋다. 앙수스 다정, 다정이 넘치는 은빛 해변에서, 여성에게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던 12세기의 프랑스에서 자신의 사랑에 당당했으며 명민함이 넘쳤던 아름다운 그녀 엘로이즈를 생각했다.
세이셸의 해변에서는 어디에 가든 바위 사이는 탈의실이 되고 그늘이 되어준다. 비행기와 배를 타고 건너오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어 휴식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 심지어 해변 뒤로 난 길을 따라가면 다른 해변과 연결되어 있다. 진정 삶의 휴가를 누릴 수 있는 곳이며, 새삼 지구는 아름다운 별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곳이다.
세이셸의 해변이 생각날 때면 나는 가끔 우문인 것을 알면서도 묻는다.
"프랄린의 앙스 라지오가 좋아, 아니면 라디그의 앙수스 다정이 좋아?"
"나는 앙스 라지오가 좋아. 그곳은 발바닥에 배기는 것이 하나도 없거든." 남편은 몇 번을 물어도 앙스 라지오에게 표를 준다.
"나는 앙수스 다정이 좋아. 다정하면서도 우아한 듯 다이내믹한 바위들이 맘에 들어. 후훗"
평화로운 앙스 라지오도 좋지만 '다정'이란 라임에 꽂힌 나는 여전히 앙수스 다정에 마음을 더 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