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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Dec 26. 2023

설탕시럽에 빠진 아몬드 '프랄린'

# 세이셸 - 프랄린


‘언젠가는 가겠지’ 하는 여행지가 있는가 하면 그 많은 여행지 중에서도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 세이셸이 그랬다. 그러나 세이셸 검색을 하면 튀어나오는 사진 속의 풍경은 지금껏 생각하지 못한 완벽한 낙원의 풍경이었다. 낙원이란 단어를 쓰다니 얼마나 유치한가, 유치해도 할 수 없었다. 영어식으로 바꾼 파라다이스는 더 유치하다. 이런 어휘는 사람을 미혹시키는 유사종교나, 사건사고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이니 말이다. 그러나 조각가가 깎아놓은 화강암으로 연출한 것처럼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그 말을 대신할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언제나 가고 싶은 발리도 아니고 그림 같은 섬이 수도 없이 많은 필리핀도 아니었다. 그곳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인도양의 작은 섬 세이셸이었다. 


가고 싶은 여행지가 줄을 섰는데 관심 밖에 있던 세이셸이 어느 날 갑자기 새치기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맨 앞자리에 말이다. 국토라기엔 너무 작아서 인도양 지도를 확대하고 확대해서 봐야만 보이는 세이셸이다. 인구는 10만 명도 채 안 되는 작은 나라이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115개의 섬이 있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손꼽을 정도이다. 여행도 가기 전에 날 사로잡았던 사진 속의 세이셸 풍경은 프랄린과 라디그였다. 믿을 수 없는 풍경은 떠나기도 전에 하나의 이미지처럼 각인되어 버렸다.     

 

수도가 있는 마에 섬 북동쪽에 프랄린과 라디그 섬이 있다.


Praslin  

    

마에에서 프랄린과 라디그를 가려니 새벽부터 부산하다.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챙겨준 도시락까지 받았다. 

세이셸의 본섬인 마에섬에서 북동쪽으로 약 45킬로미터 떨어진 프랄린 Praslin에 가려면 선착장 Cat Cocos Berth에서 페리를 타거나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면 된다. 이것은 세이셸에 오기 전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이었다. 와서 보니 Cat Cocos Berth에서 출발하는 대형쾌속여객선만 프랄린을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 6시 30분경 픽업한 투어사 직원이 데리고 온 곳은 Cat Cocos Berth 오른쪽에 위치한 세이셸 요트클럽 선착장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보트 출발이 가능해 보였다. 7시 10분경 출발 승선 인원이 약 15명 정도 되는 보트에 올랐다. 좌석에 묶여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 여객선보다는 바람을 맞고 가는 보트가 훨씬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섬 여행을 할 때는 쾌속선보다는 갑판에도 나갈 수 있는 일반 배를 더 선호한다. 다만 평소에도 멀미를 한다면 한 시간 이상 인도양의 사나운 파도를 거스르며 소형 또는 중형보트를 타고 프랄린에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잘 다녀오라는 무지개의 배웅을 받고 출발했지만, 멀미로 고생한 러시아 아이들

   

하버를 빠져나오니 잘 다녀오라고 하는 것처럼 무지개가 배웅한다. 잠깐 나왔는데 보이는 것이 별로 없는 망망대해다. 인도양의 바다에서는 내가 탄 작은 쾌속보트는 물론이고 인도양을 오가던 무거운 대형 함선마저도 한낱 나뭇잎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보트 좌석에 안전벨트도 없이 타고 있는 사람들은 배 안에서 좌우상하로 널뛰기를 한다. 1시간 이상 파도에 부딪쳐 떴다가 가라앉는 쾌속보트의 리듬을 따라가지 않으면 몸 안의 내장과 뼈들이 요동치지 않을 수 없다. 멀미약을 복용한 것과는 상관없이 얼굴이 심각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아이들이 멀미로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인도양의 사나운 파도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Praslin 하버에 도착하기까지 약 1시간 15분 정도 걸렸다. 


 Coco de Mer


Praslin National Park의 숲을 지나 9시경 발레드메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발레드메 Vallée de Mai는 오월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열대우림의 숲은 의외로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1768년 프랄린 섬을 점령한 프랑스의 고든 장군은 이 숲을 탐사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때와는 다르지만 지금도 발레드메 숲은 태초의 숲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곳에는 토종 야자수 7종이 자란다. 그중에 가장 알려진 것은 코코드메르 Coco de Mer야자수이다. 코코드메르 열매는 발레드메 국립공원은 물론 세이셸의 상징이다. 그래서 세이셸 입국도장 디자인은 코코드메르 열매 모양이다.


대항해 시대 이전부터 동부 아프리카를 왕래하던 아랍의 무역상들은 이곳에서만 나는 커다랗고 독특한 야자열매를 채취해서 팔았다. 18세기 프랑스인들이 프랄린을 점령했을 때 바다에 둥둥 떠있는 커다란 열매를 발견하고 이것을 코코드메르 coco de mer라고 불렀다. mer는 프랑스어로 바다를 뜻한다. 즉 바다의 코코넛이란 뜻이다. 

코코드메르는 원래 몰디브 섬에서 자라는 야자수였다.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코코드메르 열매도, 보르네오 지역에서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한 오스트로네시아 인들처럼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프랄린 섬에 정착한 것이다. 혹은 해류를 따라 이동한 몰디브의 상인들과 함께 이동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섬에만 자라는 코코드메르를 비롯한 야자나무는 약 6,000그루가 남아 있다고 한다. 코코드메르의 암나무와 수나무는 각각 다른데 나무는 성년이 되어서야 구분이 가능하다. 바람과, 숲에 사는 동물(도마뱀과 새 등)에 의해서 수분이 되는데 암나무 열매는 여성의 엉덩이를, 수나무에는 수술의 한 형태가 남성의 성기를 닮았다. 일년에 한 장씩 자라는 나뭇잎의 갯수로 나이를 알 수 있다. 코코드메르 열매는 식물계에서 씨가 가장 큰 수종으로 알려져 있다.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열매는 내 몸집을 가리고도 남았다.   

   

코코드메르

 Anse Lazio


세이셸의 지도에 나오는 해변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크리올어로 해변은 앙스 Anse이다. 수많은 아름답고 독특한 앙스 중에서도 프랄린 섬의 '앙스 라지오'와 라디그 섬의 '앙수스 다정'이 유명해진 이유는 영국 BBC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 명성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세계적 유명인사들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프랄린 섬 북쪽 끝에 앙스 라지오 Anse Lazio가 있다. 프랄린과 라디그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뭐니 뭐니 해도 고운 해변에 앉아있는 볼륨 있는 화강암이다. 대한민국은 질 좋은 화강암 산지이다. 화강암은 돌 중에서도 단단한 암석이다. 한국의 푸른빛을 띤 화강암과는 달리 프랄린의 화강암은 노란빛이 섞인 분홍색이다. 화강암 바위가 원시림과 함께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비치는 물 색깔과 더불어 숨을 멎게 만든다. 마치 숲 속의 계곡이 해변과 이어져 있는 느낌이다. 유려한 곡선의 화강암은 사람을 압도하는 크기까지 다양하다. 프랄린의 해변에서는 어디에나 그늘이 있어서 타월하나만 있으면 그만이다. 배가 있는 곳까지는 얕은 바다가 이어진다. 세상이 멎은 듯한 이곳의 바다는 마주 보면서 하나 되는 곳이다.    

  

Anse Lazio

36년 동안의 자유


아무도 살지 않던 프랄린 섬에 1760년 포르투갈 군함 르돔 로열 호가 암초를 만나 침몰했다. 조용했던 프랄린 섬에는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울리고 음식을 하기 위해 태운 연기는 정글을 뚫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하루에 두세 번씩 피운 연기는 세이셸 군도 옆을 항해하던 구조대를 불렀다. 그러나 구조하러 온 배는 함장과 군인들만 데리고 떠나 버렸다. 군인들만으로도 배의 무게는 함량을 초과했으니 노예들을 태울 공간과 식량은 더더욱 부족했던 것이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 프랄린섬에서는 아기들이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곧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뒤로하고 떠나버린 함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노예들은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예들이 버려진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으며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였다. 노예들은 30여 년 이상 이곳에서 가정을 꾸려 터를 잡고 살아갔다. 식구들은 얼마나 불어났는지 아름다운 섬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낙원은 이런 곳이었다. 

그 사이에 프랄린은 프랑스 관할 섬이 되었다. 1789년경에는 소수의 프랑스인과 노에들이 섬 개발을 위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수년 전 포르투갈인들이 두고간 노예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노예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의 재산이었으므로 포르투갈 관계자에게 노예들을 데려가라는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1796년 어느 날  섬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다시 노예가 되었다. 이미 프랑스 점령지였던 프랄린에서 포르투갈 소유의 노예들이 떠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하지만 한 세대 이상 정착하여 땅을 일구고 자유를 누리며 가정을 꾸려 살아가던 사람들이 태어난 아이들까지 고스란히 다시 노예가 되어버린 이 이야기에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 30여 년 동안 성장한 아이들은 청년이 되었고 힘이 넘치는 나이의 일군들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부모를 따라 노예가 되었다.  


Anse Lazio


설탕시럽에 빠진 아몬드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점령한 땅에 자신들의 국가와 왕 또는 정치지도자나 탐험가 등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들이 점령했던 세계 각국의 중요한 관광지나 도시 또는 유적지에 남아있는 그들의 흔적 대신  원래의 이름을 복원해서 부르는 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특히 영국의 전성시대를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1837~1901)의 이름은 아프리카의 빅토리아폭포를 비롯해 세이셸의 수도까지, 전 세계에 수두룩하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언짢은 것은 나뿐인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길 좋아하는 프랑스가 점령한 섬이지만 그나마 섬의 이름 '프랄린'은 예쁘고 달콤하다. 프랄린 Praslin은 본래 여러 가지 견과류를 설탕시럽에 조린 쿠키 이름이다. 어쩌면 1768년 프랄린에 처음 발을 내디딘 프랑스 고든 장군의 손에 들려 있었거나 그가 즐겨 먹던 쿠키였을까?


17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프랑스 디저트인 프랄린은 프랑스 요리사인 클레망 라사뉴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설탕생산업자이자 외무장관이었으며 군인인 comte du Plessis-Praslin(1598~1675) 백작의 조리사였던 라샤뉴는 손님이 많아서 바쁜 어느 날, 실수로 아몬드를 설탕시럽에 빠뜨렸다. 할 수없이 디저트로 내갔던 설탕시럽에 빠진 아몬드는 의외로 손님들의 호응이 좋았다. 그때부터 아몬드를 감싼 캐러멜로 만든 디저트는 프랄린 백작의 집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디저트가 되었다. 설탕이 귀한 시절에 프랄린 백작의 집에서 맛본 디저트는 외교가에서 Praslin의 이름으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디저트 쿠키로 유명해진 Praslin을 처음으로 만든 라사뉴는 은퇴 후에 파리 남쪽의 도시 Montargie에 정착했다. 프랄린은 곧 Montargie의 특산품이 되었다. 18세기에 프랑스인 수녀들을 따라 미국 뉴올리언스로 건너간 프랄린은 아몬드 대신 피칸을 뒤집어쓴 캐러멜로 모습을 바꾸었다. 


결론은 루이 13세와 14세에 활약한 프랑스 외무장관의 이름에서 달콤한 프랄린 디저트의 이름이 나왔으며 디저트 프랄린의 이름이 1768년 프랑스가 점령한 아름다운 섬의 이름이 된 것이다. 결국은 달콤한 프랄린 쿠키도 원래는 사람의 이름이었네.


설탕생산업자 :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가들 중에는 카리브해와 인도양에서 설탕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플랜터(농장주)들이 많았다. 현지 농장은 대부분 악랄한 유럽인 감독들이 경영했다. 설탕으로 대부호가 된 상인과 농장주는 자연스럽게 정치에 참여했으며 수차례 런던 시장을 역임할 정도의 가문이 나올만큼 이들의 정치적 입지는 강고했다. 당시 국왕보다도 더 호화로운 생활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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