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이셸 가는 길
세이셸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마다가스카르가 분리될 때 바다로 튀어나간 파편이거나 또는 밀려서 떨어진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엄청나게 큰 산괴나 산맥 덩어리가 통째로 바다 위로 떨어져 나와 파도를 가르며 엄청난 힘에 밀려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이셸은 잠잠해진 바다에서 얼굴을 내민 부분이다. 그래서 세이셸은 레위니옹이나 모리셔스 같은 화산섬과는 생태적으로 다르며 세이셸만의 독특한 식생과 풍광을 자랑한다.
주도인 마에(마헤)섬 주변에 있는 40여 개의 작은 섬들과 그 밖의 인도양에 흩뿌려진 듯 산재한 70여 개가 넘는 섬들은 옛날부터 물이 귀해서 사람이 거의 거주하지 않았다. 현재도 많이 다르지는 않아서 수도 빅토리아가 있는 마에섬에 세이셸 인구의 약 90퍼센트 이상이 거주한다. 115여 개의 섬을 다 합쳐도 대한민국의 광주광역시보다는 좀 작고 세종시 정도의 크기이다. 하지만 세이셸의 국토를 눈으로 가능할 수 있는 국토만으로 한정 짓는 것은 오산이다. 적도 아래 인도양에 흩뿌려진 섬들을 기준으로 한 해양국토는 엄청나게 넓다. 거의가 미개발 상태인 이들의 해양자산은 세이셸의 밝은 미래이기도 하다. 약 10만 명의 인구 중에 90퍼센트 이상이 크리올(백인 아버지와 이주민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다.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주민들은 영어보다 프랑스어, 프랑스어에서 파생한 크리올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겨 세이셸과 모리셔스를 양도받은 후에도 프랑스식 크리올어는 단절되지 않았다. 따라서 모리셔스와 마찬가지로 세이셸 지명도 공용어인 영어보다는 프랑스어 지명이 많다. 가장 큰 섬인 마에 Mahé 섬도 영어로는 마헤라고 발음하지만 많은 이들이 프랑스어 발음인 마에라고 부른다.
인도양의 섬들이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었던 포르투갈에 의해 발견되었듯이 세이셸 역시 1502년 경 포르투갈인 바스쿠 다 가마(1469~1524)의 두 번째 항해에서 유럽에 알려졌다. 스와힐리 문화권인 케냐의 몸바사와 가까운 세이셀은 먼 옛날부터 페르시아와 아프리카를 이어주던 섬이었다. 그들은 이 해역을 ‘검은 바다’라고 불렀다. 아름답지만 많은 배들이 조난을 당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해류를 보면 오스트레일리아 쪽에서 마다가스카르 방향으로 흐르다가, 마다가스카르 북부에서 오른쪽으로 휘어져 세이셸방향으로 흐른다. 당시의 해류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다면 세이셸은 함선이 쉬어가기에는 가장 좋은 지점이었다. 다만 섬 주변을 둘러싼 바위 및 산호들은 배가 침몰하는 원인이 되었다. 화강암의 해변과 산밖에 없는 아름답지만 작은 섬들은 식수마저 충분하지 않았다. 따라서 페르시아와 아랍 상인들은 세이셸군도를 꼭 필요할 때만 상선이 쉬어가는 장소로 사용했을 뿐 정착하지는 않았다(이들은 프랄린 섬에서 나는 야자 코코드메르 열매를 따다가 팔았다). 가까운 아프리카 동부에는 그들이 개발한 도시 몸바사나 말린디등의 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섬에는 아주 오래전 해류를 따라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한 오스트로네시아인 Austronesian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바스쿠 다 가마가 처음 세이셸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무인도였다. 그는 세이셸 남부의 흩어져 있는 7개의 섬(아미란테 Amirantes제도)을 일곱 자매라고 기록하였다.
1609년 1월에는 영국 동인도회사(선장 Alexander Sharpeigh)의 어센션 굿홉 Ascension and Good Hope 무역선이 인도를 가던 중에 폭풍우를 만나 항로를 이탈했다. 그들은 마에섬을 발견하고 쉬면서 물과 식량(예를 들자면 알다브라 거북) 등 필요한 물품을 실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세이셸군도는 사나운 바다환경 때문이었는지 한 세기가 지나도록 쉽게 선점하는 나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세이셸은 인도양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각 나라의 상선이나 사략선 해적들이 쉬어가는 기함지로 사용되었다. 상주하는 국가가 없었으므로 화강암과 정글로 이루어진 115개에 달하는 섬은 독립한 해적들에게는 최적의 은거지였다.
카리브해와 인도양의 섬들을 하나씩 점유해가고 있던 프랑스는 그때까지도 세이셸을 그냥 놔두고 있었다. 바위 투성이인 섬을 개발하기에는 사업성이 다른 곳에 비해 턱없이 낮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1646년에 이미 레위니옹을 점령해서 커피나무와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재미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커피묘목을 레위니옹을 비롯한 점령지 섬에 이식했으며 각종 향신료와 사탕수수를 재배하여 짭짤한 수익을 남겼다.
프랑스의 점령과 영국령
1715년 모리셔스(당시 이름은 일 드 프랑스)를 점령하고 나서야 세이셸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프랑스는 1735년 마에 드 라 부흐도네 Mahé de La Bourdonnais(1699~1753)를 인도양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임명했다. 마에 총독은 1742년 함선을 세이셸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제일 큰 섬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의 마에 Mahé섬이다. 그리고 1756년에는 니콜라스 모페히Nicholas Morphey 선장을 보내 마에섬을 비롯한 주변의 섬들을 점령하였다. 1768년에는 프랄린까지 점령했다. 점령한 섬을 통틀어서 당시 부르봉 왕조(루이 15세)에서 영향력이 있는 재무장관 장 모로 드 세셸 Jean Moreau de Sechelles(1690~1761)의 이름을 붙였다. 프랑스인들은 숲의 우람한 나무들을 벌채하고 수많은 육지 거북이들을 잡아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드디어 이 작은 섬에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위하여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785년 섬에는 프랑스인 7명과 123명의 노예들이 들어온 것이다.
18세기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카리브해와 아메리카, 인도양 등에서 설탕과 담배 등을 생산하고 거래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두 나라는 식민지의 지배권과 노예무역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걸핏하면 전쟁을 벌였다.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승리를 거둔 영국은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고, 노예들이 만든 설탕무역으로 돈을 벌고, 역으로 식민지에 영국 제품을 수출하면서 돈을 벌었다. 영국은 세계 무역의 지배권을 장악한 것이다.
프랑스와의 힘겨루기에서 승기를 잡은 영국은 인도양에서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세이셸과 모리셔스가 필요했다. 1794년 5월 영국 함선 오르페우스 Orpheus는 세이셀 마에 섬의 프랑스 함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609년 영국동인도회사의 상인들이 세이셸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거의 200년 전 이야기를 하면서 공격하는 것은, 이미 지는 해인 프랑스에게 섬을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이미 몇 번의 전투를 치렀던 후여서 피로가 누적된 프랑스는 저항을 포기했다. 다만 세이셸을 파괴하지 않고 이미 살고 있는 정착민들을 보호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1810년 결국 세이셸을 영국에게 양도했다.
1814년 파리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모리셔스와 세이셸은 영국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은 1903년 마에섬 주변의 섬들을 합쳐 세이셸제도 Seychelles라고 명명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모리셔스처럼 인도, 중국 등에서 설탕 생산을 위한 계약노동자들이 들어왔다. 이주민들이 일궈온 세월은 현재 세이셸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마에 섬 특히 수도 빅토리아 Victoria에서는 이주민들의 흔적인 인도와 중국, 그리고 크리올 문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세이셸은 1976년 6월 29일 독립하였다.
1976년 독립하기 전의 행정은 영국이 담당했으므로 출입국이 까다로운 영국식 행정을 이어받았다. 그래서인지 세이셸과 모리셔스는 출입국절차가 영국처럼 까다롭고 느리다. 반면 레위니옹은 프랑스 해외영토인 관계로 출입국 절차는 간결하다.
세이셸 입국은 세이셸 정부 웹사이트인 세이셸 e-border앱을 통하여 서울에서 미리 여행신고서를 작성했다. 10유로를 지불하면 며칠 후에 전자여행허가서(ETA)를 보내준다. 세이셸의 행정은 빠르지 않으므로 여유 있게 미리 작성하는 것이 좋다. 10일 전부터 가능하지만 행정절차는 매번 달라질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경유지 두바이에서 세이셸의 마에 공항까지 남쪽으로 약 4시간 30분이 걸렸다. 휴가가 시들해진 8월 하순이지만 아직도 가족단위로 휴가를 즐기러 온 여행객들로 작은 공항이 북적인다. 입국을 하기 위해 빼곡하게 서있는 사람들의 손에는 프린트한 여행허가서가 들려 있다. 휴대폰에 있는 e-border앱에 여행허가서가 들어있지만 안전을 대비해서 프린트를 해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입국 심사에서 빠져나오면 천장에서 돌아가는 커다란 프로펠러 선풍기 아래에는 짐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작은 공항인 관계로 짐을 운반하는 것도 인력으로 한다. 영화에서 본 남국의 20세기 초 공항 모습이다. 짐을 기다리면서 땀이 찔찔 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재채기를 하는 사람을 피해 마스크를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콩나물시루 같은 공항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짐을 찾고 나오면 환전소와 유심을 판매하는 통신사 매대가 있다. 유심이나 e심이 필요했다면 하는 김에 옆에 있는 환전소에서 환전을 했을 텐데 로밍을 해온 관계로 환전을 안 하고 그곳을 지나쳐 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좁은 공항에 잡혀있었나 보다.
공항에서 나오면 눈앞에 바위산이 불쑥 솟아있다. 세이셸의 바다를 보러 왔는데 눈앞을 막고 서 있는 산의 이미지는 퍽 이질적이다. 호텔에서 픽업 나온 차량에 올랐다. 세이셸의 본섬에 해당하는 마에(마헤)는 산으로 형성된 지형이어서 해안가 외에는 대부분 산길에 난 2차선 좁은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북쪽의 보발롱에 있는 숙소까지는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차량은 많고 2차선 도로는 좁기 때문이다.
마에섬의 북쪽에 위치한 보발롱 비치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환전부터 해야 했다. 슈퍼에서 물을 구입하고 가판대의 코코넛음료만 마시려고 해도 당장 세이셸루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광국임에도 불구하고 세이셸에서는 대부분 세이셸 루피로 계산한다. 레스토랑이나 슈퍼는 물론이고, 규모가 큰 호텔마저도 달러나 유로보다는 세이셸루피를 선호한다. 물론 여행자에게도 세이셸루피가 유리하다. 오후 세시 정도였는데도 호텔과 가까운 마을에 한 대 있는 ATM기는 문을 이미 닫은 후였다. 근처 해변 쪽에 있는 JPL X-change 환전소를 찾았다. 그나마 보발롱지역은 세이셸에서 핫한 지역이기 때문에 환전소나 ATM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므로 환전은 공항에서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좋다. 1 세이셸루피는 약 100원에 해당하는데 물가가 매우 높아서 의외로 빨리 없어진다. 세이셸을 떠날 때는 쓸모가 없으므로 한꺼번에 많은 금액은 지양하고 조금씩 하는 것이 좋다.
남반부인 8월 하순 세이셸의 날씨는 적도와 가까워 기온은 높지만 건기이기 때문에 쾌적하다. 한국의 더위를 견뎌본 사람이라면 햇빛이 강할 뿐 덥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에 방문한 1,0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마다가스카르나 레위니옹보다는 훨씬 더웠다. 세이셸은 우기와 건기가 있을 뿐 연중 기온차이는 거의 없다. 세이셸에 체류하는 4박 5일 동안 민소매나 반바지, 수영복과 모자 외에는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