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도양의 섬 레위니옹과 모리셔스, 세이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5세기 이후 인도양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대항해시대 이후에 그들의 존재가 알려졌으며 역사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기원후 300년에서 800년 사이에 보르네오섬 주변에서 이주해 온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을 사용하는 선주민이 살던 마다가스카르와는 달리 레위니옹과 모리셔스, 세이셸은 아랍상인들이 가끔 기항했을 뿐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세이셸은 일시적으로 사람이 살았던 무덤의 흔적은 있을지언정16세기 포르투갈인들이 발견했을 당시에는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섬이 드문 인도양에서 엄청나게 큰 섬인 마다가스카르와 주인 없는 섬들은 포르투갈에게 꽤나 중요한 기항지가 되었다. 머지않아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가 인도양을 공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야흐로 포르투갈의 시대
포르투갈의 엔리케(엔히크) Henrique(1394~1460) 왕자는 1415년 북아프리카 세우타를 점령하였으며, 1420년경에는 마데이라제도를 점령하고 설탕생산을 위하여 사탕수수를 심었다. 1434년경에는 그전까지 죽음의 항로로 알려진 아프리카 서해안 루트를 항해했다. 그는 금을 얻기 위하여 실행한 기니의 나이저 강 탐험에도 성공했다. 드디어 그들은 사하라사막의 대상이나 무슬림을 통하지 않고도 직접 금을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중개상인도 없으니 예전의 무슬림 상인들과의 거래에 비하면 헐값이었다. 1452년에는 포르투갈 최초로 금화가 주조되었다. 금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하여 설탕 플랜테이션을 위한 노예무역을 시작하였다.
포르투갈에게 황금기의 문을 열어준 엔리케 왕자는 그의 조국은 물론 유럽에서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무력으로 점령함으로써식민지배 역사를 시작했다. 엔리케 왕자는 유럽을 제외한 인류에게 재앙과도 같은 흑역사의 문을 연 인물이다.
대항해시대의 막을 연 포르투갈의 인물들이다. 앞에는 엔리케 왕자가 서 있다./리스본
고대에는 대부분 전쟁을 통하여 노예가 생겨났다. 그러므로 노예를 사고파는 일은 고대 이전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교역하는 수만 가지 상품 중에서 가장 값비싼 상품은 사람, 곧 노예였다. 12세기에서 15세기, 지중해와 흑해에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에 의해 노예들이 거래되었다. 인도양 서쪽 동아프리카(케냐에서 탄자니아, 모잠비크 해안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스와힐리 문화권)에는 일찍이 페르시아와 아랍 상인들에 의해 노예무역이 이루어졌다. 목재나 모피, 식료품 등을 교역하다가 생긴 일이었지만 노예 사냥꾼들에 의해 잡혀온 내륙의 아프리카인은 어느 순간 가장 비싼 교역품이 되었다. 동아프리카의 교역 중심지로 잔지바르와 몸바사, 말린디 등의 도시가 생겨났으며 페르시아와 이슬람 상인들은 해안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수세기에 걸쳐 이들과 현지 아프리카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의 후손을 스와힐리족이라고 부른다. 스와힐리족에게는 페르시아와 아랍 상인들의 DNA가 남아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페르시아와 아랍어, 반투족의 언어가 섞여 만들어진스와힐리어이다.
그러나 대규모의 집약적인 설탕 노동에 투입하기 위해 대량으로 노예사냥을 시작한 것은 포르투갈이 문을 연 대항해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무를 하다가. 냇가에서 멱을 감다가, 친구들과 놀다가 어느 순간 노예가 되었다. <노예선의 세계사>에 의하면 '1441년, 모리타니에서 베르베르계 사람 12명을 사로잡았다는 내용이 노예무역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며, 1444년에는 6척의 배로 모리타니 앞 바다에 있는 섬 Arguin에서 노예 235명을 얻었다'고 쓰여있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등 유럽인들은 설탕 생산을 위한 플랜테이션에 아프리카에서 데려 온 사람들을 동원하였다. 포르투갈이 시작한 노예무역을 마지막까지 가장 열중했던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하얀 금'인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땅을 점령한 넓이만큼의 노예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금과 노예무역을 장악한 포르투갈은 유럽의 부자들이 먹는 향신료 유통에 눈을 돌렸다. 당시에 향신료 무역은 지중해 무역을 거머쥔 베네치아 상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베네치아상인들과 연결하는 것은 무슬림 상인들의 몫(인도에서 뱃길로 홍해까지)이었다.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의 직거래를 위해서는 무슬림들이 이용하는 연안에 형성된 뱃길이 아닌 다른 바닷길을 개발해야만 했다.
당시 경제와 기술, 과학 등 모든 면에서 유럽을 압도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동안 포르투갈은 이슬람의 선진적인 천문과 지도, 조선 기술과 항해술을 익혔다. 포르투갈 사람 바르톨로뮤 디아스 Bartolomeu Dias(1450년경~1500)는 엔리케 왕자가 1434년경부터 닦아놓은 아프리카 서해안 루트를 바탕으로 1488년 2월경 현재의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발견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삼각돛의 캐러벨 Caravel 선과 사각돛을 더한 함선인 캐러크 Carrack 선(또는 카락선)에 대포를 실었다. 머지않아 남아메리카의 브라질까지 점령한 포르투갈은 황금과 노예, 향신료를 비롯한 설탕, 담배, 커피 등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1492년 3월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은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하지만 여왕은 중세의 선진적인 이슬람의 학문과 기술, 유대인의 자본이 통째로 유출이 되는 것을 간과했다. 추방된 사람 중에는 유대인 천문학자 아브라함 자쿠토 Abraham Zacuto(1452~1515)가 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은 항해사와 탐험가, 천문학자들에게는 기준점이 되는 별이다. 북반구의 선원들은 수평선 위의 각도를 측정하여 위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남반구에서는 북극성이 보이지 않는다. 남반구를 항해할 때 경도는 해안선을 타고 항해를 하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지만 위도는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아브라함 자쿠토는 해의 고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해 위도 계산기 <천측력>을 히브리어로 간행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그는 포르투갈 왕 John II세의 왕실 천문학자로 위촉되었다. 그는 포르투갈이 대항해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조력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1497년, 바스쿠 다 가마 Vasco da Gama(1460~1524)의 캐러벨 선 3척과 보급선 한 척에는 180여 명의 선원이 탑승했다. 아프리카 연안선을 따라 내려가 희망봉을 발견한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프리카 서부 연안을 타고 가지 말고 바다 한가운데로 돌아갈 것을 조언했다. 7월 8일, 타구스강을 출발한 함대는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카보베르데 제도에 도착한 뒤 선대는 대서양 한가운데를 통과하여 4개월 후 희망봉에 닿았다. 대서양은 더디게 돌았지만 동아프리카 말린디에서 인도양을 가로지르는 시간은 출발한 지 채 한 달도 안 되었다. 아브라함 자쿠토의 천측력과 케냐의 말린디에서 만난 무슬림 항해 전문가인 이븐 마지드 Ahmad ibn Mājid 덕분이었다. 게다가 습도가 높고 거센 계절풍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함대는 1498년 5월 인도 서쪽에 있는 말라바르 해안에 상륙하였다. 가까운 항구 도시 캘리컷 Calicut(현재의 Kozhikode)은 지근거리였다. 드디어 인도와 포르투갈을 잇는 인도 항로를 개척한 것이다. 비록 1499년 귀국했을 때 살아 돌아온 선원은 50여 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후추를 비롯한 향신료와 인도의 고급 직물인 캘리코(옥양목)등으로 투자원금의 60배에 해당하는 수익을 거뒀다.
바스쿠 다 가마가 최초로 항해한 인도항로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제는 이슬람 상인을 통하지 않고도 향신료를 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유럽을 상대로 한 향신료의 중개상인이 되었다. 바야흐로 포르투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시 후추의 무게는 금의 무게와 동등하게 거래되었다. 이 루트를 타고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후추와 육두구, 정향 등의 향신료를 가져왔으며 나이저 강안을 통해서는 황금과 노예를 실어 날랐다.
바스쿠 다 가마는 1524년 4월에 14척의 함대와 함께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9월에 인도에 도착한 그는 3개월 만인 1524년 크리스마스이브에 Kochi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말라리아였다. 인도 바이스로이 Viceroy(총독) 바스코 다 가마의 시신은 코치에 있는 성 프란시스 교회에 묻었다. 그의 유해는 1539년에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무력으로 동방의 땅을 처음으로 점령한 그는 엔리케와 더불어 부정적인 식민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연 인물이다.
리스본 제로니모 수도원에 있는 바스쿠 다 가마의 묘
16세기에,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오만, 인도 서부해안과 인도네시아를 연결하는, 인도양의 해안선 도시에 수많은 네트워크를 성공적으로 구축하였다. 조국 포르투갈과 수도 리스본의 교회와 수도원은 섬세한 세공을 거친 금과 은장식으로 뒤덮였다.
뛰어난 항해술은 물론 무력까지 갖춘 포르투갈의 배는 스페인이 나타나기까지는 천하무적이었다. 하지만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으로 곧 스페인과 노다지를 반분해야 했다. 뒤를 이어 약삭빠른 네덜란드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후발주자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거칠고 빠르게 식민제국을 넓혀나갔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새로운 도전자들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포르투갈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어들인 돈은 함포를 사는데 쏟아부었다.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
1599년, 네덜란드는 처음으로 몰루카에서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클로브를 선적하여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했다. 그로부터 약 40년 후인 1641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몰루카 제도에서 포르투갈을 쫓아냈을 뿐 아니라 실론과 집산지인 말라카까지 장악했다. 17세기를 기점으로 동인도의 강자가 되어가는 네덜란드를 보면서 포르투갈은 점점 쇠락해 갔다. 17세기 중반에는 그 누구도 약탈과 교역을 빙자한 강도 행위로 네덜란드가 취득한 향신료 교역의 아성을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세기 중엽에는 향신료의 종자와 묘목들이 카리브해와 인도양에 뿌리를 내리자, 동인도의 향신료를 독점하던 네덜란드의 세력도 힘을 잃어 갔다. 한편 향료제도를 기웃거리다가 네덜란드에게 밀린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에 인도 벵골 지역을 기점으로 인도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육두구와 후추/ 잔지바르에서
카리브해와 인도양을 오가는 유럽의 상선들 덕분에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불어주는 계절풍인 적도의 바람에도 무역풍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함포를 싣고 다니는 상선들만 무역품을 타는 것이 아니었다. 각국의 정부가 허가한,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갖춘 사략선(공인된 해적선)들도 무역품을 타고 다른 나라의 상선을 노략질하였다. 대서양이 주무대였던 해적들은 점차 마다가스카르와 주변의 섬에 거점을 두고 활동 반경을 확장해 나갔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내로라하는 이름 있는 해적들은 대부분 이때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17~18세기에는 후추와 정향, 육두구 등의 향신료와 떠오르는 기호식품인 사탕수수와 커피는 돈을 끌어모으는 원천이었다. 각 나라의 커피와 향신료 종자를 얻기 위한 목숨을 건 노력은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그중 네덜란드와 프랑스가 독보적이었는데 묘목과 종자를 얻기 위한 도둑질과 뒷거래가 횡행했으며 협박은 마지막 카드로 사용되었다.
인도양의 거대한 섬 마다가스카르는 이웃 섬인 레위니옹과 모리셔스, 세이셸을 비롯하여 카리브해에 만들어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공급하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마다가스카르의 넓고 비옥한 땅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영국과 프랑스의 눈길을 피해 가지 못했다. 마다가스카르를 차지하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견제는 인도양의 섬 잔지바르에 대한 영국의 소유권을 프랑스가 인정하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 그때서야 프랑스는 영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다가스카르를 향한 탐욕스러운 손길을 거침없이 뻗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의프랑스-호바 전쟁Franco-Hova Wars(1883~1895)으로 마다가스카르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메리나 왕국의 라나발로나 3세는 폐위시키고 레위니옹으로 유배시켰다.
마다가스카르 뿐이었을까, 15세기 이후 이어진 레위니옹과 모리셔스, 세이셸의 길지 않은 역사는 인도양의 파도가 만들어낸 조금씩 다른 연흔처럼 무늬가 약간 다를 뿐이었다.
사탕수수와 커피, 각종 향신료는 인도양과 카리브해를 중심으로 각 나라가 점령한 식민지에 이식되었다. 커피 묘목을 예를 들자면, 네덜란드는 그들의 식민지 자바(1699년)에, 프랑스는 레위니옹, 마르티니크(1723년)에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적도를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중남미 일대의 커피벨트는 그 시절에 형성이 된 것이다. 19세기에 이미 네덜란드와 프랑스는 커피가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커피선진국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