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레위니옹을 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헬리콥터 투어였다. 헬리콥터 투어는 시간에 따라 요금이 책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여행자들이 많이 참여하는 45분 비행에 310유로(2023년)를 지불했다. 왕복교통비까지 더하면 적은 돈은 아니지만 10일 이상 레위니옹에 머물렀다고 해도 역시 헬리콥터 투어는 했을 것이다.
투어사에 호텔로 픽업과 드롭을 요청했다. 물론 따로 요금을 내야 한다. 생 피에르에서 거리는 좀 있지만 그렇다고 많이 멀지도 않은 4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생 폴에 있는 헬기장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길에 참여할 수 있지만 예약한 사람을 순서대로 전부 소화시키고 난 다음에야 차례가 온다. 따라서 헬기투어는 사전 예약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마다가스카르에서 레위니옹으로 넘어오기 전날(이틀 전)에 예약을 했어도 이른 타임은 아니었다.
생 폴에 위치한 헬기장
짧은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헬기에 오르는데 파일럿은밝고 친절하다. 자리는 직원이 정해준다. 타고난 후에야 알았지만 좌석의 위치에 따라 만족도가 매우 달랐다. 내가 탄 앞자리와 뒷자리와는 울렁이는 고통에 차이가 있어 보였다. 파일럿 옆에 앉아서 보는 것에만 열중했던 나와는 달리 두 번째 칸에 앉았던 남편은 어지럽고 울렁거렸다고 했다. 비행이 끝나고 나서도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한동안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남편 옆에 앉았던 여자는 봉투에 계속 토했다고도 한다.
생 폴의 하늘을 날아서
마파트 협곡
헬리콥터는 생폴 상공을 날아올라 실라오스와 마파트, 살라지에 협곡 Cirque de Salazie 위를 나른다. 레위니옹의 중북부에는 ‘눈 봉우리’란 뜻을 가지고 있는 3,069미터의 피통 데 네쥬 Piton des Neiges가 있다. 거의 구름에 싸여 있는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곳이다. 그 옆(서쪽)에는 3019미터의 당당한 그로스 몬 Gros Morne 봉우리가 어깨를 마주한다. 인도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피통 데 네쥬는 폭발한 지 20,000년이 지난 휴화산이다. 지금도 수시로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남동쪽에 위치한 푸르(흐)네즈 화산에 비해 험하지만 안전한 편이다. 화산이 폭발한 후 시간이 흘러 피통 데 네쥬 화산을 둘러싸고 함몰된 세 개의 칼데라(Cirque)가 생겼다.마파트 Mafate, 살라지 Salazie, 실라오스 CilaosCirque다.칼데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져 내려 움푹 들어간 원형의 분지 형태이다. 영겁의 시간은 이곳에 야생의 밀림을 만들었다. 특히 마파트 Mafate 협곡의 이름은 '치명적인'이란 뜻의 말라가시어(마다가스카르어) Mahafaty에서 왔다. 협곡의 사나움은 노예사냥꾼의 추격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숨어들기에도 벅찼던 모양이다. 길이 닿아있지 않은 마파트는 지금도 여전히 두 발로만 갈 수 있는 곳이다.
17~18세기경 커피농장과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던 노예 중에 일부는 목숨을 걸고 깎아지른 협곡을 지나 더 깊은 계곡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추격자들도 목숨을 내걸고 밀림에서 노예들을 찾아 나섰다. 가장 비싼 상품인 노예를 찾아내는 것은 돈에 목숨을 건 추격자에겐 끝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도망간 노예를 찾아 나선 이는 어쩔 수 없이 추격자가 된 동료였을 수도 있다.
도망간 노예들의 은신처였던 계곡은 이후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마을은 칼데라에 발달한 마파트 Mafate, 살라지 Salazie, 실라오스 Cilaos 마을이다. 병풍처럼 둘러싼 협곡 안에 얼마나 많은 인구가 들어앉아 살고 있는지 마치 마을이 수를 놓은 것 같다.
살라지에 협곡으로 들어서면 절벽을 타고 실처럼 흐르는 수많은 폭포들을 만날 수 있다. 남동쪽 아래에는 트루 드 페르 폭포가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는 끝을 볼 수 없지만 강을 타고 내려가 인도양으로 흘러갈 것이었다.
마파트 협곡과 트루 드 페르 폭포(오른쪽)
긴 타원형의 마파트 계곡은 내려다보기도 아찔할 만큼 깊고 험난한데 이곳에도 사람이 산다. 마음은 산 아래 마을길을 걷고 있는데 헬리콥터는 산기슭의 폭포들을 보여주기 위해 계곡에 접근한다. 건기에도 흐르는 수많은 폭포는 실타래처럼 산기슭을 흘러내린다. 헬기가 계곡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좌우로 갸우뚱거리며 방향을 바꿔도 걱정이 없다. 이 가파른 계곡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헬기가 뜨고 내리는지 보고 들어서 알기 때문이다. 헬기 조종사는 레위니옹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다.
생브누아 쪽으로 이동하니 빗방울이 헬기 창문을 때리고 지나간다. 빗줄기 사이로 Grand Etang이 보인다. Etang은 프랑스어로 연못을 말한다. 신비로운 호수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하늘에서 볼 줄은 몰랐다. 건기임에도 타원형의 호수 모양이 그대로 보여서 가슴이 뛰었다. 신비로운 느낌은 하늘에서도 느껴진다.
Grand Etang
Grand Etang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니 오 마이갓! 오직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계단폭포인 Cascade de l'Arc en Ciel이 보였다. 양쪽으로 보여주기 위해 좁은 계곡에서 갸우뚱거리는 헬기에서 사진이 제대로 찍힐 리가 없다. 아쉬움에 고개를 돌리니 계곡 안에 있는 헬기장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눈으로 헬기장에 연결된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가니 집 한 채가 나타난다. 한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헬기장이었다.
거친 협곡을 넘으면 평탄한 고원에 아름다운 숲이 이어진다. plain des Marsoins이다. 인공림처럼 아름다운 숲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고지에 신의 손길로 가꾼 숲의 모습이다. 고원을 넘어서자 바로 아래 살라지에 협곡의 엘부르그 마을이 보인다. 마을은 어두운 청록빛 벨벳에 포근히 안겨 있다. 오지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주거지로 보였다.
살라지에 협곡과 엘부르그 Hell-Bourg마을
plain des Marsoins
실라오스 협곡
헬기장과 에스칼레이터로 연결되어 있는 주택
생 뢰의 해변
헬기는 마파트와 실라오스를 지나 생폴 바다로 나온다. 바다에 빠져도 좋을 것처럼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바다에서 고래들이 튀어 올라온다. 파일럿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고래를 가리킨다.
생 폴 Saint-Paul과 생 뢰가 있는 서쪽 바다는 레위니옹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지는 곳이며 다른 지역보다 해안선이 완만하여 1646년 프랑스 해군이 레위니옹에 처음 진주한 지역이다.
45분 동안 펼쳐지는 다른 세상의 파노라마는 누구라도 고양된 정신상태로 만들어버린다. 여행에 진심인 사람은 더욱 그렇다. 파일럿이 영어로 설명을 해주지만 이어폰은 웅웅 거리는 프로펠러 소리 때문에 또렷하게 들리지 않는다. 사전에 헬기를 탑승하는 지역과 피통 데 네쥬 화산, 마파트, 실라오스, 살라지에 협곡의 위치를 공부하고 가면 전혀 모르고 가는 것보다는 감이 온다. 6명이 정원인 헬기는 5명에서 6명이 탑승한다. 앞자리가 제일 좋지만 순서는 사무실에서 정한다. 아마도 입장할 때 자동으로 재는 몸무게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순서를 정하는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레위니옹 헬기투어 비행루트
버번 Bourbon 커피와 설탕
프랑스인들은 1708년과 1715년, 1718년 세 번에 걸쳐 예멘에서 어렵게 구한 커피 묘목을 부르봉 섬에 이식시켰다(당시 커피와 향신료 종자를 구하는 일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었다. 당시 커피 묘목은 요즘의 반도체라고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 문익점의 목화씨 사건과 비견된다). 이로써 화산섬인 부르봉 섬(레위니옹의 옛 이름)에 커피 재배가 시작되었다. 커피의 원종에 가까운 티피카종이었다. 기후와 토양이 좋은 부르봉 섬에서 처음 재배된 품종에는 섬의 이름을 부여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버번 Bourbon종이다. 부르봉 커피는 해마다 생산량이 증가하여 1800년에는 약 400톤의 커피를 생산하였다.
버번 커피는 일반인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서울에서 알아보고 간 가격은 원두 1킬로그램이 50만 원에서 70만 원에 책정이 되어 있었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고 느꼈는데 그것도 언제 책정한 가격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그것마저도 전량 본국 프랑스로 수출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생 뢰 Saint-Leu에 위치한 까르푸 매장을 찾았다. ‘레위니옹 커피를 보거든 돈을 지불할 테니 사다 달라’고 부탁을 받기도 했던 터이기도 했다. 레위니옹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까르푸 커피 매대에 생두까지 진열되어 있다. 그러나 한참을 찾아도 메이드인 프랑스나 레위니옹은 찾아볼 수 없다. 온통 다른 나라 원두뿐이다. 직원을 찾아서 레위니옹산 커피를 물었더니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다가스카르 커피를 추천한다. 레위니옹사람들은 마다가스카르산 커피를 좋아한다면서.
레위니옹 커피와 가장 가까운 종은 마다가스카르 커피가 맞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작은 섬에 불과한 레위니옹은 일종의 실험실이었다. 레위니옹에서 경작에 성공을 하면 이웃 섬 그들의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에 이식시켰다. 커피는 물론 바닐라가 마다가스카르에 그렇게 이식되었다. 바닐라는 마다가스카르의 북부에, 커피는 고지대에서 재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레위니옹의 커피를 마실 수 없다면 마다가스카르의 커피를 마시는 것은 대안이다. 부드럽고 깊이 있는 섬세한 맛의 마다가스카르산 커피도 점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지만 현재 마다가스카르 바닐라는 세계 바닐라의 70퍼센트 이상을 공급한다.
생 뢰 까르푸 커피매대 오른쪽 아래 생두가 보인다.
프랑스 동인도회사는 레위니옹에 커피와 바닐라 외에도 사탕수수를 재배하였다. 그것은 매우 노동집약적인 품목이다. 처음에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노예들을 데려와 사탕수수 재배에 투입했다. 1848년 12월 20일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에는 마다가스카르와 인도, 중국, 동부아프리카 등지에서 값싼 노동자들을 데려왔다. 레위니옹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나라의 식민지, 즉 카리브해와 인도양의 섬나라는 하나같이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운영되었다. 그곳에서는 대부분 노예들의 힘을 빌려 향신료와 사탕수수를 재배하였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추출하고 난 후 나온 부산물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 럼주이다. 그러므로 럼주의 고향은 카리브해와 인도양의 식민지 섬나라들이다. 노예나 계약 노동자의 손을 빌려 나온 거친 럼주는 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술이었으므로 사략선 해적들이 즐겨 마셨다. 럼주의 상표 디자인에 해적의 얼굴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식민지의 대형 플랜테이션 사탕수수 계약 노동자는 대한민국 하와이 이민 역사에도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800년대 후반 레위니옹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계약 노동자들/ en.wikipedia.org
사탕수수 100퍼센트로 만든 라 뻬르쉐 La Perruche 설탕
사탕수수 농사는 지금도 대규모로 유지되며 설탕은 레위니옹 경제를 떠받치는 대표 수출 산업이다. 그중에서 앵무새가 그려져 있는 라 뻬르쉐 La Perruche(앵무새)라는 제품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베긴세이 Beghin Say 사는 1837년부터 레위니옹에서 수확한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을 1889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선을 보였다. 프랑스 요리가 세계적인 요리로 거듭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때부터였다. 아프리카와 인도양, 카리브해에 퍼져있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수확한 설탕과 커피, 향신료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