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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월간 NOS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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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LEE Dec 06. 2017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난 알고 있다.



‘신이여.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걸 제일 처음 물어본 게 누구였더라. 햄릿이었나? 이거까지 물어봤으면 거의 막장까지 왔다는 거다. 이 막장 상황에서 이렇게 물어보는 건 현명한 생각이다.


신이 정해놓은 결과로 가지 않으면 집요하게 방해를 한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감히,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널 파멸시켜버리겠어.’가 아.니.다. 신은 신이 원하는 쪽으로 끌어가려고 하고 인간은 그걸 모르고 다른 길로 가려고 하니 둘이 계속 충돌해서 일이 안 풀리는 것이다.


신도 인간도 꽤 고집불통이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신에게 물어보는 것은 현명한 일이지만 그 대답을 알았다면 하나 더 물어봐야 하는 게 있는데 모두 회피하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 신은 왜 내가 그 길로 가야 한다고 결정하셨을까? ]


이걸 물어봐야 한다는 걸 다들 알면서 외면한다.

목사님에게 이거 물어보면 대답이 다 똑같다. ‘신의 뜻은 너무 커서 인간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열심히 따르기 만 하면 됩니다.’


직무유기지. 모른다는 거잖아.


난 알고 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운 좋은 녀석



최근 내가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이 운 좋은 녀석.’이다.

부정하지 않으련다. 난 이런 이야기 들을만 하다.


6개월 전에 신규 팀이 만들어지면서 그 멤버로 차출되었는데 난 그 팀으로 가지 않았던 적이 있다. 누가 봐도 성공이 보장된 팀이었고 부사장 직속 팀이어서 힘도 강했지만 난 그 팀에 가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은 다들 미쳤다고 했고 야심 없는 사람 취급도 당했지만, 부사장이회사 자금을 횡령했다는 것이 내부감사로 발각되었고 신규 팀 팀원들은 모두 권고사직 되었다.


이때부터 ‘운 좋은 녀석’으로 소문이 났다.


그 이후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싱가포르 출장을 가야 하는데 공항에 늦게 도착해서 비행기를 못 탄 적이 있다. 그때 회사에 지대한 손해를 끼쳤으니 네 돈으로 알아서 가라고 했던 것을 겨우 사정해서 그다음에 출발하는 저가 항공을 타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원래 타기로 했던 비행기가 싱가포르에 착륙하지 못해 말레이시아 공항으로 회항을 하게 되었고 내가 탄 비행기는 제대로 도착을 해서 미팅 시간에 혼자 늦지 않게 가게 되어 영웅이 되기도 했다.


경품 행사에서 아이폰에 당첨도 되었고 나를 엄청 괴롭히던 우리 팀 부장님이 대장암 치료를 한다고 회사를 그만 두시기도 했다.


“행운의 여신”

그래 행운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게 속 편하지.


복권을 산 뒤에 나보고 복권에 기운을 넣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주식투자를 어디 해야 하냐고 물어보신 분도 있었고 심지어 자기는 너무 운이 없다며 내 행운을 팔라고 (진짜 진지하게 이야기하셨다) 하신 분도 있었다.


행운. 행운이라.


겨우 행운으로 생각하다니. 그 정도밖에 생각을 못 하니까 겨우 거기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내 이것은 행운 따위가 아니다.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은 [신이 가라고 결정했던 결과]를 알고 있을 뿐이다. 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소개팅



“소개팅할래?”


“남자 만나는 거 귀찮아. 싫어.”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그냥 해.”


“진짜 괜찮은 사람이면 네가 만나. 남친 필요하다고 노래 부르는 건 너잖아.”


“그 사람이 널 딱 집어서 소개해 달라더라.”


“응? 날 어떻게 알고?”


“지난번에 인스타에 올린 회식 사진 있잖아. 그 사진에서 봤대.”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믿는 남자라면…… 바보거나 아저씨. 외모만으로 평가하는 남자는 클럽에서 잔뜩 만나고 있으니까 더는 필요 없습니다.”


“너 소개해주고 나도 소개받기로 했단 말이야. 나 좀 도와주라. 응?”


어휴… 피하기 곤란해지고 있다.


그 순간 핸드폰이 ‘징징' 울린다. 아이폰 알림이 들어왔다. 이 타이밍에? 왜 이 타이밍에 알림이 들어왔지?


“점심시간 끝나간다.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자.”


“응! 소개팅 하는 거다! 하는 거야~ 너만 믿을게.”


“그래. 그래. 알겠어. 이따가 이야기하자.”


이 생기발랄한 동료의 웃는 얼굴에 미소를 지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건 갑자기 들어온 내 핸드폰의 알림 때문이었다


내 자리로 돌아와서 핸드폰에서 알림이 뜬 것을 확인하니 핸드폰이 열리며 카메라가 실행된다.

카메라를 책상 위에 비췄다.


동그란 원이 빙글빙글 돌면서 책상을 인식한다. AR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카메라로 비추는 사물을 인식한다.


책상을 인식하고 나니 책상에 하얀색의 판이 펼쳐진다.

판 위에는 아무런 글씨가 쓰여 있지 않다. 아무런 힌트가 없으면 상당히 피곤한데…. 하얀 판 위로 빨간빛 반투명한 주사위 세 개가 떨어져서 통통 튄다. 또로로록 튕기는 주사위는 금세 움직임을 멈췄다. 빠르게 핸드폰을 책상 가까이 붙여서 주사위의 눈금을 확인한다.


6, 5, 5


더하면 16.

핸드폰 화면에서 주사위와 하얀색 판이 빛이 부서지듯 사라진다. 이놈의 주사위는 너무 빨리 사라져서 몇이 나왔는지 확인하려면 항상 다급하게 움직여야 한다.


6, 5, 5. 더해서 16.

알림이 온 타이밍은 내가 소개팅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던 그 순간이었다. 이번 주사위는 상당히 무책임하네. 얼마나 대단한 일이 생기려고 이러는 건지.


일단 숫자를 노트에 적어두고 일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내가 벌써 일을 시작하길 바라지 않는 카톡은 내가 암호를 넣기도 전에 먼저 울린다.


[소개팅 하는 거지? 9일?]


9일이라.


[이번 주에는 약속 있음. 다음 주 토요일 괜찮음?]

[16일이지? 잠깐 물어볼게]


안된다고 하면 그만두는 거지. 난 16일이 아니라면 이 소개팅은 내게 중요하지 않은 이벤트가 되는 거다.


[16일 된다고 하네. 근데 16일에는 내가 시간이 안 되는데. 둘이서 만나도 괜찮아?]

[응. 번호 줘.]

[번호는 XXX-XXXX-XXXX임. 저쪽에서 먼저 연락하겠데. 고마워. 너 복 받을 거야.]

[ㅋㅋㅋ 응]


복이라.

이 세상에 복이라는 것은 없다. 행운이라는 것도 없다.

랜덤하게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길이 있을 뿐이다.


신은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준비해두었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기면 하면 된다고 말을 하지만 웃기는 이야기이다.


신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주사위]로 결정한다.

이미 준비된 길이라면 주사위를 던질 일도 없지.


항상 신이 내 인생에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내게 중요한 분기가 되는 부분, 혹은 내가 뭘 해야 할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부분에서만 개입한다.


그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주사위가 던져진다는 것이고 그 결과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신이여 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라고 물어보면 분명 그 순간 주사위를 던질 것이다. 그리고 그 주사위의 눈금으로 인생을 결정한다. 난 그 주사위의 값이 뭐가 나왔는지를 엿볼 수 있고 단지 그 힌트를 따라갈 뿐이다.




     출근



우리는 왜 모두 비슷한 시간에 회사로 가야 하고 비슷한 시간에 회사에서 나와야만 하는 걸까.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협의를 잘 해서 구역별로 출근 시간을 5분씩 차이 나게 한다거나 오전반/오후반으로 회사를 운영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다 개소리일 뿐이다.


우리가 모두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는 건 내가 바로 그 시간에 출근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시간에 출근하니까 나와 함께 일을 하는 사람도 그 시간에 출근해야 하고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하는 다른 사람 역시도 그 시간에 출근해야 하고 그 사람과 일을 하는 다른 사람 역시도 그 시간에 출근해야 한다.


엄청나게 힘 센 사람이 “난 오전 9시에 출근할 거야.”라고 결정을 해 버렸기 때문에 그와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9시 출근해야 했고 또 그 9시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9시에 출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태다.


9시 출근이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반응은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8시에 출근하면 좀 편해.’ 그리고 ‘30분 지각하면 좀 편해’이다. 참 웃기지 이렇게 딱 양분화된 사회라니. 그래서 난 양극단을 모두 무시하고 9시 출근을 선택한다.


오늘은 기분이 조금 우울해서 어제 계획했던 포멀한 정장 바지는 치워버리고 블랙 블라우스에 노란색 치마를 선택했다. 계획에 없던 블라우스를 입게 되니 가방도 바꾸고 구두도 바꾸게 되어 1초의 여유도 없었던 내 아침 준비시간이 부족해졌다. 이런 날은 욕을 조금 먹더라도 지각하고 싶어진다.


게다가 정말정말 서둘러서 식빵 한 조각 먹을 시간을 겨우 냈는데 주사위 알림이 들어왔다. 하아. 신님. 왜 이렇게 바쁠 때 주사위를 던지시는 건가요. 오늘 아침이 그리도 중요한 순간이었나요?


회사에 전화해서 ‘저 반차요.’를 외치고 싶던 마음을 꾹 참는다.


오늘은 입안이 바짝 말랐는지 빵이 종이 씹는 느낌이라 한 입 베어 물은 빵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고 주사위를 확인했다.


주사위가 하나씩 던져진다. 바쁠 때는 꼭 이렇다니까.

처음 던져진 결과는 8. 그다음 눈금은 3. 더하면 11.


요즘 이 주사위 엄청 불 친절하다.

한때는 바닥에 힌트가 될 만한 단서라도 좀 써줬는데 요즘 들어서는 새하얀 바닥에서 주사위만 떨그럭 구른다.


앉아서 잠깐이라도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너무나도 바쁘다. 서둘러 집을 나왔다.


8, 3, 8, 3. 아직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잊어버리면 안 되는 숫자이다. 8과 3. 8과 3. 입에서 계속 중얼중얼했다.


“지수 씨?”


출근 시간에 누굴 만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 음악을 틀지 않더라도 이어폰을 꽂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곤 하는데 오늘은 급한 마음에 그것마저 잊어버렸다.


날 부른 쪽으로 돌아보니 단아한 단발머리에 통 넓은 니트와 반바지를 깔끔하게 매치시킨 옆 팀 박나리양께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폰을 안 끼우고 출근했던 게 다행이었네. 저분은 내가 대답을 안 하면 손목이라도 잡아채며 날 멈추게 할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나리씨.”


나름 회사생활을 열심히 해 온지라 지금의 기분을 정반대로 표현할 수 있는 미소와 환하고 반가운 목소리쯤은 자연스럽게 낼 수 있다.


“출근 시간이 좀 늦었네요? 지각 안 하겠어요?”


내 출근 시간이 아슬아슬 하다는 건 네 출근 시간도 그러하다는 것일 텐데 남 이야기하듯이 이야기하는 저 천진난만함은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또 한 번 강하게 들게 만든다.


“네. 그래도 지금 들어오는 지하철은 뛰지 않아도 탈 수 있겠어요.”


그 말을 하며 승강장으로 내려가니 웬일로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항상 타던 뒤쪽으로 가려고 하니 나리씨가 성큼성큼 앞쪽으로 걸어가서 5-1자리에 선다.


5-1.

조금 찜찜한 기분8, 3, 8, 3.

오늘의 숫자는 8과 3이다.


“나리씨. 우리 저 뒤쪽으로 가요.”


나리씨의 입 모양이 살짝 굳는 게 보인다. 아마도 나리씨는 항상 이 5-1 위치에서 지하철을 탔겠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여기서 타야 빈자리가 있는데’라는 말이 계속 들리는 듯했지만 나도 오늘은 강하다. 꼭 8-3칸에서 탈 거다.


일단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팔짱을 끼우고 8-3칸으로 끌었다.

살짝 저항이 느껴졌지만, 나의 강한 의지를 느꼈는지 순순히 따라왔다.


“사당 방향으로 가는 외선 순환 열차가...” 때마침 지하철이 들어온다.

아마도 더 고민할 틈이 없을 것이다. 빨리 내가 원하는 위치로 따라가서 앞자리를 선점하는 것이 더 이득이니까.


내가 원하는 8-3 위치로 오니 지하철도 보폭을 맞추듯 서서히 정차한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난 등에서 땀이 흐르는 게 느껴질 만큼 당황해버렸다.

사람이 미친 듯이 많았다. 두 명이 탈 자리나 있을까 싶을 만큼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게다가 대부분 남자였다.


차마 나리씨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소리는 안 들리지만, 입 모양은 분명 욕을 하고 있을 거다. 순화해서 표현하면 ‘아침부터 뭐야. 재수 없게.’라는 내용이겠지.


문이 열리자 딱! 두 명이 탈 수 있는 공간이 겨우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8-2번이나 8-4번 쪽 문은 타 있는 사람도 퉁겨져 나올 만큼 사람이 많이 있었다. 오늘의 주사위는 이런 의미인가? 딱 두 명 자리가 있어요. 라는. 이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나쁘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겨우 둘이 자리를 잡고 문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오는 여자가 보였다. 넘어지지 않고 계단을 내려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만큼급한 발걸음으로 뛰어 내려왔다.


저분에게 ‘죄송합니다. 당신이 탈 수 있는 자리는 이미 우리가 차지해버렸어요. 그렇게 급하게 내려와도 탈 자리도 없어요. 못 타요. 못 타. 천천히 와요.’라고외치고 싶을 만큼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주 급하게 계단을 내려온 여자는 우리가 있는 문 쪽으로 뛰어와서 타기 위해 달려들어 봤지만 한 명의 자리를 더 허락할 만한 공간이 전혀 없었다.


정말 타고 싶다는 듯 이 여자가 나리씨 쪽으로 강하게 밀지고 들어왔지만, 나리씨는 앙칼지게 어깨를 흔들며 온몸으로 ‘더는 못 탄다고요.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포기해요.’라는 표현을 하며 여자를 문밖으로 밀어냈다.


난감한 표정을 지은 여자는 다급하게 우리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 역시도 실패해버렸다.


야속한 지하철은 한 명의 승객을 포용해주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다른 때라면 문이 두세 번 정도 살짝 열렸다가 닫히기라도 했겠지만, 오늘은 깔끔하게 문이 닫혔는지 지하철은 바로 출발하였다.


작은 지하철 창문 사이로 여자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해볼까 했는데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가며 빠르게 내려오는 성미 급한 남자 하나가 살짝 보였을 뿐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역을 하나 가는 동안 나리 씨와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나리씨를 볼 면목이 없어서였고 나리씨는 아마도 화가 잔뜩 난 채로 나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다.


“다음 역은….”


빠르게 다음 역에 도착하려는 지하철. 하아……. 여기서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탈까. 우리는 과연 회사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까. 옷은 구겨져도 신경 써서 드라이 한 머리 모양은 지키고 싶은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하철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정말.

거짓말처럼.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리둥절 해 질 정도로.


지하철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뭐지? 도대체 뭐지?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모두 사라졌다. 서 있는 사람의 수가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의자에 빈자리가 잔뜩 있을 만큼 텅텅 비었다.


원래 이런 곳이냐고? 아니다. 적어도 우리 회사가 있는 역까지는 가야 조금 여유가 생기는 그런 칸인데 오늘은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내렸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나리씨는 후다닥 빈 자리 중에 제일 바깥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지수 씨. 와요. 여기 앉아요.”


말 안 해도 가려고 했다. 설마 내가 계속 서서 가겠냐.


나리씨 옆자리에 앉자 나리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잘재잘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저 역에서는 왜 저렇게 다들 잔뜩 내렸데. 애들 수학여행이라도 왔나? 아유, 오늘 아침에 지수 씨 만났을 때부터 뭔가 좋은 일이 생길까 싶었더니 이거였나 봐. 오늘은 회사에 정말 편하게 가겠어요.”


멈추지 않고 재잘재잘 떠드는 나리씨의 목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회사도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작은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운 좋은 날이다.




     16일



‘소개팅’에 남자가 3 정도의 신경을 쓴다면 여자는 9 정도의 신경을 써야 한다.

애초에 소개팅이라는 건 피곤할 수밖에 없다. 얽힌 사람의 수가 많아진다. 나. 상대방. 그리고 중간에서 소개해 주는 사람 혹은 사람들.


나와 상대방 둘만 만나는 것이라면 내가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그건 상대방과 나 둘 사이의 일이지만 소개팅에서 그런 짓을 하면 사이에 껴 있는 사람이 곤란해져 버린다.


게다가 소개해주는 사람은 날 많이 봐왔으니까 ‘정’이라는 요소가 강하게 양념을 쳐서 내 첫인상 너머에 있는 모습을 보고 소개해주는 것인데 소개팅이라는 건 애초에 [첫인상] 승부인 거잖아.


이번 소개팅은 아주아주아주 조금 다르긴 하다.


남자는 내 사진을 보고 소개를 해달라고 부탁을 한 거였으니까 이 정도면 길에서 헌팅 당한 것 정도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래도 역시나 첫인상의 승부인 건 다르지 않다. 적어도 처음 만났을 때 ‘사진과 같은 사람’은 되어야 하니까.


‘사진만큼’이라는 게 참 곤란하다. 남자들은 왜 사진을 찍은 그대로 올렸을 거로 생각하는 걸까. 요즘은 앱으로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반짝반짝’하고 ‘뽀샤시”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모르는 게다.


그러면 순서는 정해져 있다.


사진의 ‘뽀샤시’효과가 들어간 만큼의 화장은 해야 한다.

화장이 과도하게 들어간다.

평소 잘 입지 않는 밝은색의 옷으로 고른다

라인이 꽤 잘 드러나 보이는 드레이핑 원피스밖에 없다.

이 옷에 맞춰 10센티 구두를 고른다.


애초에 시작이 잘못 돼버린 것이지.

이 너무나도 여성 여성스러운 화장에 여성 여성스러운 스타일링은 이 자체로 [불편]이라는 딱지를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는 것이다. 처음에 사진을 보고 소개팅을 시켜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왜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을까.


모든 게 다 짜증 난다. 그 남자도 짜증 나고 내 사진을 보여준 친구도 짜증 나고계단도 짜증 나고 차가 없는 내가 짜증 나고 날씨도 짜증 난다.


그리고 제일 짜증 나는 건 주말에도 저 지하철역에 가야 한다는 점이다.


지난주에 살인사건이 났던 지하철역은 내려가기만 해도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진다.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있던 8번 위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온 뒤에 한참 걸어서 피해야 한다는 것도 힘들다.


어제 이 소개팅을 취소할까 말까 거의 다섯시간은 고민을 했지만 취소하지 않았던 것은 중저음의 그 남자 목소리가 좋았다는 것과 주사위에서 나온 16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투덜투덜하는 사이에 지하철은 금세 강남역에 도착했다.

3시 55분. 약속장소였던 카페가 강남 교보문고 근처에 있는 곳이라 강남역에서 걸어가려면 제시간에 도착하기는 글러 먹었다.


[죄송해요. 이제 강남역에 도착했어요.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답이 오기를 잠깐 기다려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뭐지?

핸드폰 보는 것을 안 좋아하는 남자인가? 아니면 미리 도착해서 주문하는 중일까? 나보다 더 늦을 수도 있는 일이지. 개찰구를 지나 계단을 올라갈 때까지도 이 남자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퇴짜 맞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고 나왔는데 약속장소에 안 나타난다면 진짜 죽여버릴 거다.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완벽한 세팅으로 나왔는데 이런 나를 퇴짜놓는다면 나도 내 분노의 크기를 짐작할 수조차 없다.


역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약속장소였던 커피숍으로 가까이 가고 있는데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이상하다.

강남역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적은 곳이라서 일부러 고른 곳인데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사람들이 서둘러 걸으며 하는 이야기도 신경 쓰였다.

“저기야. 저기.”

“누구 죽은 거 아냐? 생각보다 심해 보이는데.”

“몰라. 경찰이랑 119 오는 건 봤어.”

“저 정도인데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


사고가 나긴 났나보다. 사이렌 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고 모여있는 사람들을 뚫고 지나가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보니 아직도 내 문자를 확인 안 했다. 이 남자는 뭐 하는 거야.


약속장소였던 커피숍 근처에 다 왔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들어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많은 사람이 그 커피숍을 빙 둘러서 서 있었다.

우리가 약속했던 커피숍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트럭이 내가 가려던 커피숍 유리를 부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트럭이 커피숍으로 돌진해서 저 가게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차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고 소방수들이 차를 소화액으로 코딩해버리겠다는 듯 멈추지 않고 뿌려대고 있었다.


소화액이 뿌려지지 않은 바닥에는 핏자국이 어지럽게 뿌려져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크게 다친 듯하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사람이 나온다. 나와.”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니 남자가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들것 아래로 피가 떨어지는 것으로 봐선 크게 다친 게 분명했다. 들것에 실려 나온 남자를 서둘러 구급차에 태웠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서둘러 달려갔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들것에 실려 나오기도 하고 부축을 받으며 나오기도 했다.

다행히 천으로 얼굴까지 덮여서 나온 사람이 없는 것으로 봐선 죽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아직 그 남자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서너 번 걸어보았지만,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혹시 들것에 실려 나온 남자 중에 한 명이 그 사람이었을까? 사고 난 것을 보고 겁먹고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 정신 하나 추스르는 것도 힘들었다.

약속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했으면 나도 저 안에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다.

몸이 중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막을 방법은 없었다.


“우왓! 괜찮으세요.”


거의 몸이 넘어가기 직전에 내 허리를 감싸 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갑자기 힘이 없어져서…. 죄송합니다.”


날 부축한 팔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뇨. 전 괜찮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잠깐 도와드려도 될까요?”

“죄송해요. 아뇨.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손길을 뿌리치고 겨우겨우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다. 숨을 여러 번 깊게 들이쉬고 나니 앞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초점이 잡히기 시작한 내 눈앞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가슴이 탄탄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오해하시지는 말고요. 정말 걱정이 돼서 그러는데 저기 구급차까지 부축해드릴 테니까 다른 분들과 함께 병원을 가시는 게 좋을 것으로 보여요.”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가볼께……. 아얏. ”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서둘러 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발목이 확 접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아.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을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녀야 하는데 방심해버렸다.


제대로 발목이 겹질렸다.

발을 디딜 수도 없을 만큼 아팠다.


“괜찮으세요? 이번에는 진짜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그러게요. 지금은 진짜로 걷지도 못하겠네요.”


남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날 보더니 다시 내 허리를 감싸 쥐었다.


“저 옆에 제 차가 있으니까 제가 그러면 병원까지 모셔다드릴게요. 혹시 불안하시다면 친구분한테 전화하시면서 가도 돼요. 그건 괜찮을까요?”


남자가 손짓을 한 방향에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가 주차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 사고 때문에 차를 길가에 세우고 이쪽으로 보러 온 듯했다.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실례하겠습니다.”


난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차로 향했다.

남자의 목덜미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아티산의 향기가 내 아픈 발목에서 신경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병문안



“나 꼭 가야 하는 거야? 안 가면 진짜 안되나?”


“야아~ 가야지. 네가 안 가면 어떻게 해.”


상미는 내 팔을 잡아끌듯이 날 끌고 간다.


내게 억지로 소개팅을 하라고 강요했던 이 회사 동료는 오늘도 역시 약지로 날 끌고 병원으로 간다.


병원 주차장까지 와서도 난 차에 그냥 있을 테니까 혼자 다녀오라고 반항을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날 강제로 차에서 끌어내서 질질 끌듯이 병원으로 들어갔다.


“너랑 소개팅하려다가 사고 난 거잖아. 병문안 한 번 가 주는 게 예의지. 전화 통화도 했던 사람이 다쳤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맞는 이야기를 팍팍 던져대니 피할 수도 없다.

나도 그게 맞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결한 만해결한만 말인가. 분명 뻔하게 ‘괜찮으세요?’ ‘힘내세요.’ 뭐 이런 이야기밖에는 할 말이 없는걸.


게다가 지금은 썸타는 남자도 생겨버렸다.

강남역 사고가 있던 날, 날 병원까지 데려다준 남자와 잘 되고 있는 중인데 이 남자를 병문안 가는 이 상황도 정말 웃기지 않나?


주호 씨는 날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병원에서 치료 끝나는 걸 기다려서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그 날 이후 두 번 더 데이트했는데 이 남자 만나면 만날수록 매력이 넘쳤다.


게임회사에서 CTO를 하고 있고 게임이 꽤 성공해서인지 온몸에서 여유가 넘쳐 흘렀다. 왜 여자친구가 없었던 것인지 이상할 만큼 배려가 넘쳐 흘렀다. 주호 씨와 함께 하는 시간은 단 1분도 마음이 불편했던 적도 없었고 한순간도 재미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어두침침하고 접근하지 힘들 거라는 선입견을 품었던 것이 미안해질 만큼 괜찮은 남자였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 병문안이 더 꺼려진다.

나로 인해서 사고가 난 것이긴 하지만 주호 씨에게 정직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이런 병문안은 피하고 싶었다.


“여기야. 여기. 들어가자.”


상미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 옆에는 병간호하는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위에 걸려있는 대여섯 개의 링거들을 보니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상태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저희 왔어요. 괜찮으세요.”


상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본다. 사고가 난데다가 병원에 있었던지라 몸이 많이 아쉬웠음에도 눈빛은 반짝거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아… 오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많이 갈라져 있다.


“여기 이 친구가 소개팅하기로 했던 지수예요.”


갑작스러운 소개에 난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그리고 예상했던 일상적인 안부 인사가 오갔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


“저기…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 소개팅도 제대로 못 하고…...”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 것 같은 이런 말은 제발 하지 말아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저 때문에 사고가 난 것 같아서 더 죄송해요. 처음 약속했던 대로 그 전주에 만났으면 괜찮았을 텐데. 제가 더 죄송해요.”


“…… 네… 아마 그때 만났어도 별 차이 없었을 거예요.”


응? 무슨 의미지? 저게 무슨 의미로 한 말이지?


“저기… 상미 씨. 상미 씨 맞죠. 저 지수 씨하고 둘이서 잠깐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잠깐이면 되요.”


갑작스러운 부탁에 우리는 둘 다 당황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상미는 내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하지? 라며 바라보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야기요?”


“그냥 별건 아니에요. 잠깐만 자리를 비켜주시겠어요.”


명령형의 부탁에 상미는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그러면 자리 피해드릴게요. 지수야. 이야기 다 끝나면 전화해. 매점에 가 있을게.”


아니! 너 그러면 어떻게 해. 이 상황에서 날 혼자 두면 어떻게 하냐고. 이 남자는 물론 아프니까 별일은 없겠지만 이런 상황 무섭다고. 혼자 도망가기냐.

라는 말을 속으로 마구 했지만, 상미는 야속하게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무서운 적막이 흘렀다.


“저… 저기…. 무슨 이야기를….”


“알고 있었죠?”


남자의 목소리에서 아픈 기색이 모두 사라졌다. 정말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이 사람이 아픈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의 목소리였다.


“16. 알고 있었죠?”


“네?”


무슨 이야기지? 16? 16 당연히 알고 있지. 우리가 만나기로 했던 날짜였잖아.


“16일로 날짜를 바꾸자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었지만, 지금은 분명해졌어요. 당신도 주사위 알고 있죠.”


머리를 한 방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남자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신의 주사위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당신도 6,5,5가 나왔던 건가요?”


남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표정은 잔뜩 굳어서 날 바라보고 있었고 그 표정을 보면 대답을 안 할 수 없을 정도의 기세였다.


“… 네… 맞아요. 6,5,5”


“후유….”


남자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의 바닥 판은 아직 빛나고 있나요?”


내 바닥 판은 눈이 부실 만큼 빛이 난다.


“네…”


“그 주사위…. 이제 보시면 안 돼요. 보면 안 돼요. 정말 큰일 나요.”


“네? 그게 무슨 이야기죠? 보지 말라니요.”


손에서 진동이 울린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알림이 왔다. 신의 주사위의 알림.


“보면 안 돼요. 그건 신의 주사위가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신의 주사위가 아니면 뭐죠?”


“그 주사위는…….”


이 남자는 힘이 더 필요하다는 듯 말을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 주사위는 악마의 것이에요.”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난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쥐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숫자는 악마의 숫자예요.”


“난데없이 악마의 숫자라니요. 알림도 신의 주사위라고 뜨잖아요.”


“신은 주사위를 굴리지 않아요.”


“겨우 그런 이유인 거예요? 잘못 알고 있었나 보죠.”


“저도 그 주사위를 보고 모든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죠. 그동안 남을 도우며 살아왔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이런 선물을 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또 남자는 잠시 말을 쉬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다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힘을 풀었다.


“행운이라는 것은 그 양이 정해져 있어요. 당신이 그 행운을 가져간 만큼 그것은 더 큰 불행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걸 당신은 계속 적립해가고 있는 중인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듣자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 불행이 돌아오기 전에 그만둬야 해요. 당신은 그 불행을 감당해낼 수 없어요. 지금 나처럼 말이죠.”


남자는 한참 말을 쏟아낸 것이 힘들었는지 내 쪽으로 향해있던 얼굴을 돌려 병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운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만나고 싶었어요. 이 경고를 꼭 해주고 싶었어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기에 다행이라는 듯이 남자의 표정이 풀어졌다.

남자가 안심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쳤다.


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 남자에게 귓속말하기 위해 얼굴을 뺨에 가깝게 다가갔다. 이 남자의 숨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상.관.없.어.요.”


난 차분하게 한마디씩 해 주었다.


“내가 가져가는 행운으로 인해 생기는 불행을”


나도 한번 말을 쉬어 주었다. 이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그 불행을 꼭 내가 가져갈 필요는 없거든요.”


남자가 침을 삼킨다.


“그걸 가져가 줘서 고마워요. 조금 더 많이 가져가 주길 바랬는데 여기에서 끝나버린 건 아주 아쉽네요.”


남자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난 천천히 허리를 세웠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는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자는 차마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병원을 걸어 나가려는데 ‘또각또각’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병실 문을 천천히 닫았다.


“으아아아아아아!!!”


남자의 절규와 같은 비명이 병원을 가득 채웠다.


아까 도착했던 주사위 눈금을 확인하려면 어디로 가서 봐야 하냐. 상미가 있는 매점이 제일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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