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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LEE May 14. 2020

아니, 그게 아니고요

내가 일하면서 말 하기 진짜 싫어하는 문장의 원탑은 "아니. 그게 아니고요."이다. 같이 일을 하면서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의미를 가진 문장은 모두 주의해야 한다. 그중에서 저 문장은 상대방이 기획을 하던, 프로그래밍을 하던, 그래픽 디자인을 하던 관계없이 화나게 만들 수 있는 궁극의 한마디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의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친구가 아닌 애들끼리도 전설 아이템 거래가 되고 있다는 거잖아요."

"네. 그렇죠. 막는 부분이 없어요."

"하아. 미치겠네. 아니 그게 왜 되고 있지? 누락된 거네."


빠직! 빠지지 지지직! '누락'. 이 단어는 프로그래머에게는 명치 아프게 만드는 강력한 어퍼컷이다. 꼭 내가 잊고 빼먹은 듯한 느낌이다. 생각지도 않게 명치를 얻어맞았지만 흥분해서는 안된다. 아직은 숨 쉴만하다. 쓰읍. 후우. 쓰읍. 후우.


"에픽은요?"

"친구가 아니면 에픽 아이템 거래는 안돼요."


꼭 말로 상대를 가격할 필요는 없다. 표정으로도 수많은 잽을 순식간에 때릴 수 있다. 지금 저 인간처럼 '어이가 없네.' 표정을 지으면 된다. 이 상황과 주제를 조금 나한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한 마디가 필요하다. 음... 뭐가 있을까.


"아!! 거래가 되는 경우가 하나 더 있어요. 같은 길드일 때."


내 딴에는 괜찮은 한 마디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야기를 한 의도는 '아이템의 거래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풀려있어요. 그러니까 친구가 아닌 애들끼리 전설 아이템 거래되는 것도 조건에 따라서 풀려있는 것입니다.'였는데  카운터 어택 급의 공격이 들어왔다.


"하아... 도대체 제가 모르는 게 또 뭐가 있는 거죠?"


우와. 순간적으로 들어온 돌려차기에 방심하고 있다가 턱주가리를 제대로 얻어맞았다. 뭐지 이 미친놈은?


내게 쉴 틈 없이 공격을 하고 있는 이 분은 회사 들어오신 지 1년쯤 되셨다.

이 게임은 서비스한 지 5년이 됐다.

지금 네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기능은 3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에 관련된 문서는 없으니 네가 이걸 모른다고 해도 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뭐? 모르는 게 또 뭐가 있냐고?

야이! 씨! 네가 알고 있는 게 있긴 한 거냐!라고 말을 할 뻔했다.

 

버그잖아요


"이거 수정 요청할게요. 버그잖아요."


그래. 이렇게 쐐기를 박아버린단 말이지?


이건 버그가 아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전설 아이템 거래를 위해서 조건을 검사하고 하위 상황을 확인하고 유저 상태를 추가로 확인하는 복잡한 소스코드가 만들어져 있다. 프로그래머가 버그를 만들기 위해서 이걸 이렇게 복잡하게 검사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신경 써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냥 수정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렇다. 만약, 수정 요청이 들어오면 검사하는 부분을 모두 주석 처리하고 그 상단에 왜 주석으로 바꿔놨는지 써 놓으면 된다. 저 인간의 실명 언급하면서 차분하게 'XXX님 요청으로 변경'이라고 하면 된다. 이건 프로그래머들끼리 남겨놓는 데스노트이다.


그럼에도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냐면 첫 번째는 단어의 선택이다.


화가 나는 두 가지 이유


기획, 그래픽 디자이너, 프로그래머 사이에는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 그래서 서로 금기로 생각하는 단어도 다르다. 심지어 프로그래머도 서버와 클라이언트 사이에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 그래서 기획에 이야기할 때는 “문서에 빠져있던데요.”, “이건 정해주셔야죠..”라는 문장을 쓰면 화낸다. 그래픽 디자이너에게는 칭찬해 준다며 “이거 그 유명한 게임 그거랑 느낌이 비슷한데요.”라고 말했다가 사이가 틀어진 적이 있다. 프로그래머에게는 “버그 찾았어요.”, “기획서에 써 놨는데 누락하셨네.”, “서버 자주 떨어지잖아요.”라고 하면 바로 표정 안 좋아진다.


이런 단어 안 써도 충분히 대화 가능하다.


이것보다 내가 화를 낸 가장 큰 이유는 왜 이게 예전에 이렇게 해 놨는지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이게 왜 화가 나냐고?

이렇게 수정해서 좋은 결론으로 끝난 적이 없다.


똑같이 동작하지 않고 예외로 동작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수정일 경우 높은 확률로 다시 롤백된다.

이게 진짜 프로그래머 화나게 만드는 일의 탑 오브 탑이다.


뭔가 수정을 할 때는 그걸 왜 하는지 그리고 그걸 변경해서 얻고자 하는 효과는 뭔지, 그리고 그걸 버그나 누락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뭔지 알려주었으면 한다.

“근데 그거 왜 해요?”라고 물어보면 화낼 거면서 참 남 생각 안 한다.


하아....

오늘도 난 데스노트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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