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임 투 킬>
(영화의 결말 내용을 포함합니다.)
옛날 영화를 좋아합니다. 옛날 사람인가 봅니다. 90년대 감성을 그리워하는 것이죠.
이 옛날 영화 <타임 투 킬>은 1996년 개봉했으니 삼십 년쯤 됐네요. 비슷한 시기에 나온 <슬리퍼스>와 양대산맥을 이루며 이십 대의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슬리퍼스>는 하필 또 영화관에 혼자 가서 봤는데, 그 공포와 긴장감,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잔상이 많이 남았던 두 작품입니다. 당시에 이 영화들을 본 이유는 법정 드라마였기 때문인데요, 법정 공방은 저의 최애 아이템이랍니다.
<타임 투 킬>을 다시 볼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삶과 사람을 다르게 보게 되었으니 감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습니다. 마침 동거인들 중 남자 세 명이 여행을 가고, 수험생은 스터디 카페에서 살다시피 하여 집이 참으로 조용했습니다. 와인 한 잔과 함께 여유를 즐기던 참이었죠.
영화 <타임 투 킬>은 인종차별과 정의에 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법정 스릴러의 대가로 알려진 존 그리샴의 동명 데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열 살 된 흑인 소녀 타냐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식료품을 사서 귀가하던 길에 술과 마약에 취한 행실 나쁜 두 백인 청년에게 폭행과 윤간을 당하고, 살해 의도로 버려집니다. 그러나 소녀는 죽지 않고 구조됩니다. 백인 우월주의가 팽배한 미시시피주. 유사한 범죄에서 백인 가해자들이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무죄 석방된 최근의 판례를 알고 있던 타냐의 아버지 칼 리 헤일리는 대범하게도 두 명의 가해자를 법원 건물에서 사살합니다.
칼 리는 가족과 함께 있다가 경찰관들이 집으로 찾아오자 순순히 따라나섭니다. 그는 왜 현장에서 스스로 붙잡히지 않았을까요. 작별 인사를 하러 집으로 갔던 걸까요. 아내와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힘없이 경찰을 따라가는 장면은 정말 슬펐습니다.
피의자는 젊은 백인 변호사 제이크 브리갠스에게 변호를 부탁하며 무죄 석방을 주장합니다. 과연 칼 리는 무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역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합니다. 이 사건으로 흑인과 백인은 각자의 커뮤니티에서 흥분하고 서로를 정죄하며 인종 간 갈등이 뜨겁게 심화합니다. 백인 우월주의에 기반한 KKK 미시시피 지부가 설립되고, 변호사 제이크에 대한 협박이 시작됩니다. 흑인은 적이며, 적을 돕는 동족은 배신자라는 논리였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스스로 심판한 사람, 그리고 광적으로 흑인을 비하하며 백인 우월주의를 유지하려는 사람들. 자경적 폭력을 주고받는 양 진영의 모습은 참혹합니다. 과연 정의는 무엇일까요? 사법 정의를 논할 수 있는 상황일까요?
제이크의 집이 방화로 전소되고 비서의 남편이 사망하는 등 극심한 위협과 압박이 목을 조여옵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호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크는 끝까지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칼 리를 변호합니다.
야망이 크고 노련한 검사, 그리고 비우호적인 판사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백인 변호사. 배심원단도 모두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공과금도 내지 못하는 궁핍과 끊이지 않는 협박과 위협,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왜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았을까요?
이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바로 ‘공감’입니다. 결국 공감의 힘이 승리합니다. 방관자의 시선이 아닌, 나의 일일 수도 있다고 여기는 마음, 만약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라면 어땠을지 헤아려보는 마음이 사법 정의를 초월하는 승리를 거둡니다.
부모로서 어린 내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그 공포의 순간에 계속해서 아빠를 불렀지만 아무도 도울 수 없었다면, 그래서 정신적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심각한 신체적 상해를 입어 자궁이 손상되고 열 살에 불임 진단을 받게 된다면,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가해자들이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무죄 석방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런 공감은 처음부터 제이크의 마음속에 있었고, 그 공감이 배심원들의 마음에도 스며듭니다.
또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들 역시 백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깊다는 점입니다. 그들 역시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틀리다고 규정하고 담을 쌓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백인이었습니다. 아주 낮은 수임료로 변호를 맡은 제이크가 그랬고, 마지못해 KKK에 합류했지만 비밀리에 피해를 미리 경고하거나 피해자를 구출해 주는 젊은 백인 남성이 그랬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흑인들의 파티에 가족과 함께 방문한 제이크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을 통해 인종 간 갈등에서 백인들이 먼저 화해를 청하도록 권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영화 제작의 제반 기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기에, 현시점에서 이 영화는 다소 아쉬운 점도 보입니다. 삼십 년 전의 영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크게 실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개봉 당시에는 다소 장황하고 늘어진다는 평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5~6부작 시리즈로 제작했다면 오히려 갈등과 호소가 더욱 섬세하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존 그리샴의 소설 영화화 작품 중 최고라는 평을 받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실제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존 그리샴은 자신의 경험과 사회의식을 작품 속에 녹여낸다고 합니다. 그는 독자들을 사로잡는 많은 작품을 출간하며 명성을 쌓았고, 여러 작품이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2020년에 출간된 『자비의 시간』이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고 하네요. 『타임 투 킬』과 속편 『속죄나무』에 이은 제이크 브리갠스 시리즈입니다.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소년을 변호하게 되는 제이크 역에 매튜 맥커너히가 다시 캐스팅되었다고 하니 더욱 기대됩니다. 마치 잭 리처의 법조인 버전이라고 할까요.
새 시리즈를 올해 공개하기 위해 이 오래된 영화를 넷플릭스에 올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90년대 감성과 정의의 또 다른 버전을 느낄 수 있는 법정 스릴러 <타임 투 킬>. 이번 주말에 감상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모든 이미지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