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극단적인 감정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완전한 날 것입니다.
칸트 쌤이 말한 이성을 되찾거든 언제 어느 때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간 아무리 고되어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아니 정확히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을 오늘 쏟아낸다. 나는 부모가 된 것을 후회한다.
내가 부모가 된 것에 대하여는 누구 원망할 대상조차 없다. 나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정말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이 사회의 암묵적인 요구에 저항하지 못한 것일까.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나는 부모가 된 것을 후회한다.
너무나도 미숙했던 내가 정신건강을 공부하면서 조금 성장했고 또 부모 노릇을 하면서 또 한 번 성숙해질 기회를 가졌기에 부모가 된 것은 내 영혼에 축복이었다. 세 아이를 기르면서 신선한 행복도 느꼈으며, 뼈를 깎아내는 듯한 애씀으로 새로운 영혼들을 이 세상에 내놓는다는 기쁨도 있었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이 중요한 것, 이 시기가 지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금 아이들로 인해 행복하다고 떠들어댈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금의 나는 후회라는 감정이 가슴에 맺힌다.
다자녀가 다복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쳇, 그분들이 사춘기가 되어 보라지! 애 셋, 사춘기를 겪어보지 않았다면 감히 자녀로 인한 행복 따위 논하지 말라. 고대에 알렉산드리아도서관에도 벽낙서에 “요즘 애들 버릇없어.”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하지만(사실 이건 낭설이라고 한다),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라지만, 이건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이기주의와 책임이라는 걸 도통 모르는 방종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래전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 잠시 봉사하던 때, 고1 아들을 둔 권사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라는 말을 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대학생이던 나는 그 무슨 망발인가, 하고 생각했고, 결혼하고 부모가 된 뒤에는 오죽하면 그러셨을까, 동정했으며, 중고딩 삼 남매를 모시게 되니 이제야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공감에 이르게 된다. 겪어봐야 안다.
인생 전인미답, 미증유의 길.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결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줄 몰랐으니 낳았지, 이럴 줄 몰랐으니 결혼을 했지, 이럴 줄 몰랐으니 태어났지! 왜 우리는 레테의 강을 건너야만 하는가? 이전 생의 기억을 왜 지워버리는 것인가? 왜 우리는 망각의 차를 마셔야만 하는가? 기억하고 있어야지, 알고 있어야지. 그래야 새로운 생을 잘 살아서 다시 태어나는 악순환을 끊을 수가 있지. 왜 몽탕 잊어버리게 해서 다시 원점으로, 또다시 원점으로, 하는 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것인가!
나는 부모가 된 것을 후회한다. 무엇 때문에? 부모가 되어서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안 들기에, 무엇이 힘들기에 후회하는가?
오늘의 사건으로는, 자식이 내가 나 되게 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며, 내가 내 생을 통제하는 것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내 영혼에 목숨줄과 다름없다. 너에게는 너의 인생, 나에게는 나의 인생이 있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참고 참아주고 가르치고 타이르는 무한반복을 해왔건만, 자신의 행동이 부모에게 폐가 된다고는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는다. 어디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이런 인간이 사회에서 사람 노릇하며 살 수나 있겠나. 그놈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굽신거리며 비위 맞추며 돈 들여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또 그 돈을 벌기 위해 눈치 보아가며 고군분투해야 하는가.
그러나 부모가 받아주지 않으면 누가 받아주나. 그래, 그렇지. 그럼 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대체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었기에 이생에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왜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야만 하는가. 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여 다람쥐의 쳇바퀴보다 더한 고해를 헤매어야 하는가.
보아하니 이번 생도 글렀나 싶은데, 만일 업보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생이 나에게 필요하거든 제발 부탁이니 쓰든 달든 내 기억을 지워버리지 마쇼. 뭘 알아야 해결을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뇨!